취향을 사랑한다. 취향이란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가장 섬세한 지문이다. 취향의 뚜렷함을, 취향의 변덕스러움을, 취향의 우연성을 모두 사랑한다.
같은 커피숍에서도 어떤 이는 창가 자리를 선호하고, 다른 이는 벽면 코너를 좋아한다. 어떤 이는 재즈가 흐르는 공간에서 책을 읽고, 다른 이는 완전한 정적 속에서만 집중할 수 있다. 이 미묘한 차이들이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취향은 존재의 증명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거부하는가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이 취향을 통해 발현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확인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거부함으로써 경계를 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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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내가 어떤 멜로디에 끌리는가는 단순히 청각적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축적된 시간들, 기억들, 감정들의 총체적 반응이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들으며 숭고함을 느끼는 사람과 힙합 비트에서 생명력을 얻는 사람은 서로 다른 우주에 살고 있다. 둘 다 옳고, 둘 다 아름답다.
패션도 마찬가지다. 어떤 옷을 입느냐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준다. 미니멀한 검은색 옷만 입는 사람은 자신을 단순하고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어 한다. 화려한 패턴과 색깔을 즐기는 사람은 삶 자체를 축제로 만들고 싶어 한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책을 고르는 취향에는 더욱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어떤 이는 고전 문학에서 인간 본성의 영원한 진리를 찾고, 다른 이는 과학 소설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어의 함축과 여백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에세이를 선호하는 사람은 사유의 흐름과 논리의 정교함에서 쾌감을 얻는다. 이 모든 선택들이 그 사람의 내면 지도를 그려나간다.
공간에 대한 취향은 또 어떤가. 나는 높은 천장과 큰 창문이 있는 공간을 좋아한다. 빛이 충분히 들어오고 시야가 막히지 않는 곳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 반면 어떤 친구는 아늑하고 아담한 공간을 선호한다. 낮은 천장 아래, 따뜻한 조명 속에서 그는 안전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지만 서로 다른 건축물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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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취향은 부조리하다.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을 갖고 있다고 믿지만, 동시에 그 취향은 타인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받고 형성된다. 소셜미디어에서 보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이, 친구들의 추천이, 알고리즘의 제안이 내 취향을 조금씩 바꿔놓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취향의 진짜 아름다움이다. 취향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나의 취향이 다른 사람의 취향과 만나서 새로운 취향을 만들어내는 것, 그 역동성이야말로 삶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는 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은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준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는 우연히 본 인터뷰에서 알게 되었다. 이 모든 우연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 취향을 만들었다.
취향은 재료들의 집합이 아니라 요리하는 방식이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요리사마다 다른 맛을 낸다. 같은 추천을 받아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르게 발전시킨다. 내가 그 카페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 그 음악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내는지, 그 작가의 어떤 문장에 밑줄을 긋는지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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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취향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취향은 완성품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어제의 내가 좋아했던 것을 오늘의 내가 시시하다고 여길 수 있다. 지금까지 관심 없던 분야에 갑자기 빠져들 수도 있다. 이런 변화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나는 뚜렷한 취향을 예찬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 자신의 기준이 있는 사람, 타협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는 생명력을 느낀다. 그들은 세상의 무수한 선택지 앞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자신만의 나침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취향의 열린 가능성도 사랑한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고, 다른 사람의 추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존 취향을 업데이트할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성장한다. 그들의 취향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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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취향은 정체성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직업이나 학력보다도, 나이나 출신지보다도, 취향이 나를 더 정확하게 정의한다. 취향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고, 내가 선택하는 기준이며, 내가 추구하는 가치의 구현이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는가? 당신의 취향은 얼마나 뚜렷한가? 당신은 자신의 기준을 믿는가?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다.
물론 취향을 만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고, 너무 많은 의견이 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좋아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취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나는 완벽한 취향을 원하지 않는다. 일관된 취향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있는 취향을 원한다. 계속 변하고, 계속 성장하고, 계속 놀라게 하는 취향을.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얼마나 흥미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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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취향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취향을 갖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취향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좋아한다.
아메카지의 절제된 색감을, 올리브와 베이지가 만들어내는 은은한 조화를. 몸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편안한 핏을. 데님과 카키, 카모와 치노가 연출하는 미묘한 톤의 변주를. 화려하지 않지만 정확한, 그 절묘한 균형감을.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가 새벽 공기를 가르는 순간을, 루드비코 에이나우디의 선율이 만들어내는 명상적 시간을. 미니멀한 구성 속에서 피어나는 무한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 선율 위로 떠오르는 그 순간을.
비 내리는 아침의 영화관을, 히치콕의 현기증과 이창을. 메멘토와 인셉션을, 파이트클럽의 어둠과 블랙미러의 냉소가 만들어내는 디스토피아적 시를. 영화와 날씨가 완벽하게 동조하는 그 우연한 완성을.
파우스트의 붉은 빛깔과 디사론노의 달콤 쌉싸름함이 혀끝에서 피어나는 순간을. 술잔을 기울이며 종결하는 하루의 끝을, 그 완벽한 종료의 의식을.
크러쉬의 보컬이 아침과 조우하는 순간을, 딘의 멜로디가 그려내는 새벽의 세련된 우울을. 코드쿤스트의 비트와 DPR IAN의 몽환적 사운드스케이프가 만나는 완벽한 접점을. 알고리즘이 결코 포착하지 못할 그 은밀한 연결고리들을.
새벽 천변을 거닐며 발견하는 내면의 소음과 소음 속에서 발견하는 내면의 정적을. 단순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늘어짐을. 복잡한 세상에서 발견되는 가장 원초적이고 완전한 아름다움을. 설명이 필요 없는 그 절대적 매력의 순간들을.
주짓수 매트 위에서 마주하는 순수한 승부의 세계를, 상대방과 나 사이에 오직 기술과 의지만이 존재하는 그 명료한 순간을. 가드를 뚫고 서브미션으로 향하는 그 완벽한 수순을, 패배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몸의 언어를. 땀과 노력이 만들어내는 가장 정직한 결과를, 설명이 필요 없는 절대적 승부의 미학을.
요루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의 절대적 평온을,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을. 골골송이 만들어내는 원시적 안락함을, 언어가 닿지 않는 순수한 교감의 순간을. 디지털 세계의 모든 연결이 무색해지는 그 물리적 접촉의 완전함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의 형태를.
이 은밀한 선택들이 나를 완성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집합이 곧 내가 되고, 그 취향들 사이의 미묘한 연결고리들이 나라는 존재의 고유한 문법을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