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험의 행성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by 조융한삶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역설


자말 말릭, 뭄바이 빈민가 출신의 18세 소년은 퀴즈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의 우승자가 된다. 그의 인생은 마치 퀴즈쇼의 답을 찾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보였다.


첫 번째 문제. "영화 '지드'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는?"

정답. 아밀 칸


그가 답을 알고 있던 이유는 형 살림이 그 배우의 사인을 받으려다 화장실에 갇힌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문제. "인도 국가에서 '모든 종교는 진리다'라고 부른 사람은?"

정답. 마하트마 간디


어머니가 힌두 광신도들에게 살해당하던 그날, 어린 자말이 간디의 사진을 움켜쥐고 있던 기억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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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나올 때마다 그의 과거가 펼쳐진다. 각각의 대답은 그가 겪어온 참혹하고도 우연한 경험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기차 지붕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던 순간,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는 라마 신을 본 경험, 타지마할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거짓 가이드를 했던 시절, 그리고 무엇보다 라티카를 찾기 위해 헤맨 모든 시간들.


우연일까? 2천만 루피가 걸린 마지막 문제에서조차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라마와 시타의 이야기에서 시타를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넌 것은?" 하누만. 그가 그 답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해준 이야기.


경찰은 그를 의심했다. 어떻게 무학의 빈민가 소년이 모든 답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자말의 진술을 들으며 모두는 전율한다. 그의 모든 '우연한' 경험은 하나의 완벽한 서사로 직조되어 있었다. 그가 퀴즈쇼에 나간 이유마저도 우연이 아니었다. 라티카가 그 프로그램을 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이 운명인가, 우연인가? 자말은 매순간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사랑을 위해, 형을 따라가기 위해. 하지만 그의 모든 '자유로운' 선택은 거대한 필연의 그물망 속에서 이미 예정된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카페 카운터 앞에 서 있다.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인가, 아이스티를 마실 것인가. 자말과 나, 무엇이 다른가? 규모의 차이일 뿐, 본질은 같다. 우리는 모두 선택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선택이 정말 우리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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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을 가장한 우연들의 집합


자말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그의 '운명'은 사실 수만 가지 우연의 조합이었다. 1992년 뭄바이에서 태어난 것, 힌두 원리주의자들의 습격을 받은 것, 특정 기차에 탄 것, 특정 고아원에 간 것. 하나라도 달랐다면 그는 퀴즈쇼의 답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만남, 태어난 시대, 자란 동네, 다닌 학교. 모든 것이 우연의 연쇄다. 하지만 이 우연들이 충분히 쌓이면 필연처럼 보인다. 마치 운명이 있는 것처럼.


카페로 돌아와서. 내가 이 음료를 고르는 순간에도 수백 가지 우연들이 작동하고 있다. 어제 밤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아침에 본 광고, 지갑 속 카드의 잔액, 심지어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까지. 모든 것이 우연이지만, 모든 것이 내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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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초의 비밀: 뇌과학이 폭로한 자유의지의 허상


1983년, 벤자민 리벳은 0.35초의 간극을 발견한다. 리벳의 실험실에서 피실험자들은 자유롭게 손목을 구부렸다. 하지만 뇌파 측정기는 무서운 진실을 보여주었다. 의식이 '지금 움직이겠다'고 결정하기 훨씬 전에, 뇌의 운동피질에서는 이미 신호가 발생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 안의 또 다른 누군가가 먼저 결정을 내리고, 의식은 그저 그것을 추인하는 것처럼.


자말이 퀴즈쇼에서 답을 맞혔을 때, 그 순간 그의 뇌에서는 무엇이 일어났을까? 그가 '아, 답은 하누만이다'라고 생각하기 전에, 이미 그의 뇌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목소리를 불러냈을 것이다. 의식적 기억보다 빠른 신경세포들의 속삭임.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뇌 속에 모험의 유전자를 품고 있다. DRD4라는 이름의 작은 수용체가 그들을 벼랑 끝으로 이끈다. 반대로 짧은 대립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안전한 길을 선호한다. 여러 선택 앞의 미세한 설렘들은, 사실 도파민 분자들의 춤이다.


태내 환경 또한 결정적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감정 패턴이 결정된다. 세로토닌 농도가 낙관주의자가 될지 비관주의자가 될지를 정한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감정적 반응들은 태아기 화학적 환경의 산물이다. 출생 전부터 각본은 이미 써져 있다.


'내가 선택한다'고 믿는 그 순간, 이미 뇌는 결정을 내렸다. 자유의지는 사후적 환상에 불과하다. 이 사실이야말로 쿤데라가 말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정체가 아니었을까? 그 환상의 가벼움이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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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족쇄들: 기질부터 유년기까지


기질은 선험적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조용한 아이였다. 시끄러운 곳을 피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이것이 선택이었을까? 아니다, 기질이었다. 내향성이라는 이름의 타고난 성향이 평생 내 선택 패턴을 결정했다. 내가 조용한 카페를 선호하는 것도, 소규모 모임을 좋아하는 것도, 모두 기질의 발현일 뿐이다.


환경은 더욱 강력하다. 내가 자란 동네의 분위기,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학교의 문화. 이 모든 것이 내 선택의 범위를 미리 정해놓았다. 강남에서 자란 아이와 달동네에서 자란 아이의 꿈이 같을 수 없다. 자말이 타지마할 가이드가 된 것도,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태어났다면 월스트리트를 꿈꿨을 것이다.


애착은 가장 은밀한 족쇄다. 존 볼비가 밝혀낸 것처럼, 유아기의 애착 스타일이 성인기의 모든 관계를 결정한다. 안정 애착을 형성한 사람은 건강한 관계를 맺고, 불안정 애착을 가진 사람은 문제적 관계를 반복한다. 사랑의 방식조차 유아기의 경험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


결핍은 욕망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어릴 때 부족했던 것은 평생의 갈망이 된다. 관심이 부족했던 아이는 인정받고 싶어하고, 물질적으로 부족했던 아이는 소유하고 싶어한다. 욕망은 자유로움이 아니라 결핍의 반전일 뿐이다.


유년기 경험은 가장 깊은 각인을 남긴다. 결정적 시기에 형성된 패턴은 평생 반복된다. 트라우마든 행복한 기억이든, 개인의 모든 후속 경험을 해석하는 틀이 된다. 자말이 어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이 그의 모든 선택에 스며들어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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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필요충분조건: 필연의 공식


불이 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산소, 가연물질, 열. 이 세 조건이 만족되면 불은 반드시 점화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화학적 필연.


인간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 조건, 환경적 자극, 과거 경험이 결합하면 특정한 선택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고백하자면, 내 과거 연인들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다. 명랑한 성격, 갸름한 얼굴형, 고양이 같은 눈매, 또랑또랑한 목소리, 높은 하이톤으로 웃는 방식까지. 나는 매번 '운명적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했다고, 특별한 인연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특정 얼굴 패턴에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신경 매커니즘에 불과했다.


공식은 간단하다. 특정 얼굴형에 대한 유전적 선호도 + 사회적 학습을 통한 매력 기준 + 만남의 기회 + 당시의 호르몬 상태 = 사랑이라는 이름의 화학 반응. 나는 자유롭게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DNA와 도파민의 지시를 따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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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특정 향수 냄새를 맡으면 나는 거의 자동적으로 그 사람에게 끌린다. 이성적 판단도, 상황적 고려도 모두 무력해진다. 심장이 빨라지고, 시선이 따라가고, 대화하고 싶어진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다. 호감이라고 부르지만, 후각 기억과 도파민 분비로 형성된 조건반사에 불과하다.


이 또한 공식이 있다. 특정 페로몬에 대한 후각수용체의 민감도 + 과거의 긍정적 후각 기억 + 현재의 호르몬 상태 + 상대방의 유전적 적합성 = 돌이킬 수 없는 끌림. 운명적 사랑이 아니라 생물학적 알고리즘의 실행.


카페에서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카페인에 대한 개인적 민감도 + 과거 경험에서 축적된 맛의 기억 + 현재의 기분과 컨디션 + 지갑 속 돈의 양 + 주변 사람들의 선택 + 메뉴판의 시각적 배치 = 아메리카노 혹은 라떼. 예측 가능한 공식이다.


자말의 경우는 더욱 명확하다. 빈민가 출신이라는 환경적 조건 + 생존을 위한 본능 + 라티카에 대한 애착 + 퀴즈쇼라는 기회 = 필연적 참가. 그는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조건들이 그를 그곳으로 밀어넣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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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가능한 인간


현대 AI 시스템들은 이를 완벽하게 방증한다. ChatGPT는 내가 다음에 할 질문을 예측하고, 유튜브는 내가 좋아할 영상을 찾아준다. 넷플릭스는 내가 다음에 볼 영화를 90% 정확도로 맞히고, 스포티파이는 내 기분에 맞는 음악을 큐레이션한다. 아마존은 내가 살 물건을 장바구니에 넣기도 전에 미리 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의 선택이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데이터만 충분하면 미래의 행동을 계산할 수 있다. '개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우리 모두가 알고리즘의 패턴 안에 있다.


우리는 '우연히'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본 영상, 우연히 들은 음악, 우연히 만난 사람. 하지만 그 모든 '우연'은 치밀하게 결정된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게 된 계정도, 유튜브에서 구독한 채널도. 알고리즘이 내 과거 검색 기록, 체류 시간, 반응 패턴을 종합해서 정확히 계산해낸 결과다. 모든 것이 빅데이터와 머신러닝의 산물이다. 자발성은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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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예언: 무경험의 행성에서


이제 쿤데라의 통찰이 새롭게 보인다. 존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이유는 우리에게 진정한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자유의지가 없으니까 모든 것이 가벼운 것이다. 무게를 느끼려면 책임이 있어야 하고, 책임이 있으려면 선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선택이 환상이라면?


'무경험의 행성'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진짜 선택의 무게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선택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조건들의 결과였으니까. 그래서 모든 것이 가볍다. 책임도, 후회도, 의미도. 우리는 선택의 주체가 아니라 조건들의 결과물일 뿐이다.


자말을 다시 보자. 그는 2천만 루피를 얻었지만, 그것이 과연 그의 성취였을까? 그의 지식, 그의 경험, 그의 용기, 심지어 그의 사랑까지도 모두 조건들의 산물이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자유의지는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판매하는 가장 큰 키치다. "당신의 선택이 당신을 만든다"는 거짓말. "노력하면 된다"는 환상. "꿈은 이루어진다"는 허구. 실제로는 우리는 조건들의 합으로 결정된 존재들이다. 유전자와 환경, 기질과 경험,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조합체일 뿐이다.


카페에서 음료를 고르는 이 순간에도, 나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내 선택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모든 변수를 입력하면 결과는 자동 산출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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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 허무주의와 조건부 자유


그렇다면 절망해야 할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삶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 자체가 어떤 종류의 자유일지도 모른다.


자말은 마지막 문제에서 답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추측했다. 그리고 맞혔다.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자유의지인지 조건반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그가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다. 조건들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지만, 마지막 순간의 선택만큼은 그의 것이었다.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는 듯이 행동한다. 이것이 모순일까?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조건이다. 경험의 질감만큼은 대체 불가능하다.


'조건부 자유'. 완전한 자유는 아니지만, 완전한 결정론도 아닌 것. 조건들 안에서 발견하는 작은 틈새, 예측된 범위 안에서의 미세한 일탈.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이자, 충분한 자유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듯이 살아가는 것. 조건부이지만 진짜인, 제한적이지만 충분한, 가볍지만 무겁운,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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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가 옳았다.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우며, 영원회귀는 알 수 없다. 삶은 일회적이고 유한하기에, 우리는 무경험의 행성에 의존한다. 하지만 그 가벼움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조건들 안에서, 조건을 넘어서려고 시도하는 것. 예측 가능한 존재이면서, 예측 불가능한 순간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것. 적당한 유머와 적당한 진지함으로 대응하는 것. 답을 모르는 채로 추측하는 것, 조건들에 둘러싸인 채로도 사랑을 믿는 것, 자유의지가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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