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의 언어
향은 가장 직접적으로 기억과 연결된다. 시각이나 청각이 복잡한 인지 과정을 거쳐 의식에 도달하는 것과 달리, 후각은 대뇌변연계로 곧장 침투해 감정의 원시적 층위를 건드린다. 그래서 어떤 냄새는 우리를 순식간에 과거로 데려간다. 시간을 접어서 현재와 과거를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능력. 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 존재의 시간성에 대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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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을 끄고 음식에 집중하는 일은 현대인에게 금기에 가깝다. 우리는 언제부터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이 금기를 받아들이면 흔한 라면조차 새로운 형태로 감각된다. 계란 노른자의 크리미한 비릿함, 바지락이 품은 바다의 짠 어둠, 면발 사이로 스며드는 추억의 질감들. 이 모든 것이 코끝에서 일으키는 작은 폭발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 그 순간 음식은 단순한 영양 공급원이 아니라 존재와 직접 대화하는 매개체가 된다.
우리 시대의 감각적 빈곤은 어디서 오는가. 멀티태스킹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경험을 분산시키고, 깊이 있는 감각적 몰입을 시간 낭비로 치부하며 살아간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영상을 보고, 길을 걸으면서도 이어폰에 의존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이는 효율성의 극대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경험의 질적 박탈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동시에 하면서도 아무것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역설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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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리코 향기의 원시적 충만함을 떠올린다. 비가 그친 후 땅에서 피어오르는 이 특별한 냄새는 지구상 어떤 향수로도 완벽히 재현할 수 없다. 또한 파마약의 화학적 자극이 불러일으키는 변화에 대한 기대감, 새 신발 가죽의 냄새가 품은 미래에 대한 설렘. 이 모든 감각들은 단순한 화학적 분자가 아니라 시간이 결정화된 파편들이다. 각각의 향은 그 순간의 감정과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다시 맡을 때마다 과거의 나와 조우하게 된다.
게다가 신경가소성에 의해 뇌는 죽을 때까지 변화하고 적응할 수 있으며, 감각 또한 훈련을 통해 유연하게 확장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과학적 사실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희망이다. 우리의 감각 능력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세계를 더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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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훈련한다는 것은 결국 세계와 더 깊이 관계 맺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존재의 질감을 더 세밀하게 읽어내는 능력이며, 동시에 타자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소믈리에가 와인에서 수십 가지 향을 구별해내는 것처럼, 우리도 일상의 감각들을 더 정교하게 분해하고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정확한 사랑은 정확한 감각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의 체온을, 목소리의 떨림을, 눈빛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는 능력에서.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감각적 각성은 단순히 개인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는 능력이며, 결국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토대가 된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는 능력, 자연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민감성, 이 모든 것이 감각의 윤리학이다.
코끝의 언어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세계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내는 은밀한 편지를 해독하는 일이다. 감각적 각성이야말로 존재의 밀도를 높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조금만 애정을 갖는다면, 조금만 자주 알아차린다면, 일상은 놀라운 감각의 교향곡으로 변모할 수 있다.
결국 감각한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나는 감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꿔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향기로운 존재,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이 아닐까. 세계의 모든 향기에 열려있는 존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