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수상록2 27화

침묵의 웅변술

산책을 듣는 시간

by 조융한삶




2015년, 지리산 섬진강 오토캠핑장을 기억한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목격했다. 대여섯 명의 농인 캠핑팀이 만들어낸 그 특별한 침묵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소통의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그들은 매우 조용하면서 매우 시끄러웠다. 격하면서도 차분한 손짓과 몸짓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했다. 소리는 없었지만 그 공간은 의미로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진정한 목소리는 반드시 성대를 거쳐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깊은 말은 때로 침묵의 형태로 전달된다는 것을.



-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습관적으로 가속화된 일상에 몸을 맡겨왔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거리 달리기를 하듯 가능한 빠른 속도로, 축구선수의 급격한 방향 전환처럼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눈동자로 질주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끌어와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속력이 빠를수록 시간은 느리게 간다고, 그러니 빠르게 읽어서 시간을 벌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기기만에 가까웠다. 빠름 속에서 나는 무언가 본질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며 창밖 풍경을 놓치는 것처럼, 속도에 취해 정작 중요한 것들을 지나쳐버리고 있었다.



-



진정한 소통은 '2인 3각 달리기'와 비슷하다. 혼자만의 독주가 불가능하다. 느리지만 천천히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서로를 배려하며 한 발 한 발 타이밍을 맞춰야만 한다. 단어 하나, 호흡 하나. 문장 하나, 호흡 하나. 비유 하나, 호흡 하나. 그렇게 꾹꾹 눌러 담으며 의미를 읽어나가야 한다.


지리산의 농인들이 보여준 것처럼, 진정한 소통은 서로의 리듬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들의 몸짓 언어는 단순히 말을 대신하는 도구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교감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였다. 손끝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그들의 언어는, 음성 언어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풍부했다.



-



개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늘 혼자만의 질주를 꿈꾼다. 남보다 빠르게, 남보다 먼저, 남보다 많이. 디지털 플랫폼들은 이런 욕망을 부추긴다. 무한 스크롤과 실시간 알림, 끊임없는 업데이트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빨라진다. 조급해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은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


우리는 지금 언어의 과잉 속에 살고 있다. SNS의 무한 피드, 쏟아지는 뉴스 알림, 끊임없는 메시지들.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바벨탑의 시대다. 이 디지털 소음 속에서 진짜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져간다. 마치 라디오의 주파수를 잘못 맞춘 것처럼, 모든 소리가 뒤섞여 의미 있는 신호보다는 백색잡음만 들릴 뿐이다.


그래서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은 여백을 만든다. 그 여백 속에서 진정한 의미가 응축된다. 좋은 건축 공간이 사람을 머물게 하듯, 좋은 침묵은 생각을 정착시킨다. 농인들의 손짓 사이사이에 스며든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의미로 충만한 공명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무음의 공간에서, 나는 가장 웅변적인 언어를 만났다.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우리는 소통의 속도와 깊이를 동시에 완벽하게 측정할 수 없다. 빠르게 전달되는 메시지일수록 그 의미의 깊이는 흐려지고, 깊은 의미를 담으려 할수록 전달의 속도는 느려진다. 농인들의 언어는 이 역설을 우아하게 해결하고 있었다. 느리지만 정확하고, 조용하지만 강렬했다.



-



2015년 지리산의 여름날, 나는 가장 조용한 아우성을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가장 웅변적인 언어였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빠르지 않음으로써 더 깊은 곳에 도달하며, 소리내지 않음으로써 가장 선명한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깊은 침묵일지도 모른다. 더 빠른 연결이 아니라 더 느린 교감일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질주가 아니라 함께하는 걸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알고리즘과 데이터 흐름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침묵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언어로.



keyword
이전 26화믿음의 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