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정원
의식은 하나의 거대한 유적지다. 수십 년간 차곡차곡 쌓인 믿음들이 지층을 이루고, 그 위에 일상이라는 문명이 세워진다. 성실하면 성공하고, 노력하면 보상받으며,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는 아름답고 순진한 신념들이 유년기 사고의 토대를 이룬다.
그러다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엔 머리카락 굵기만 한 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균열은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고, 마침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화강암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실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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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의 시작은 의외로 사소한 순간들이다. 시험 공부를 하던 대학 시절 새벽, 청소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기억한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다니니까 좋겠네." 그녀의 말에는 부러움이 아니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새벽 다섯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일해도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다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목소리였다.
그 아주머니는 나보다 훨씬 성실했고, 나보다 훨씬 오래 노력해왔을 텐데. 그런데도 가난했다. 내가 믿고 있던 능력주의라는 신화에 첫 번째 금이 갔다. 아니, 원래부터 거기 있던 금을 처음으로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이런 순간을 경험한다. 자신이 믿어온 세계의 질서가 현실의 불협화음과 만나는 순간.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사람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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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기원은 놀랍도록 우연적이다. 부모님의 한 마디, 교과서의 한 문장, 뉴스의 한 보도가 하나씩 생각의 지층을 만든다. 마치 강물이 운반해온 퇴적물이 하천 바닥에 쌓이듯, 무수한 정보의 파편들이 의식 깊숙이 침전된다.
교묘하게도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공기를 마시듯 무의식적으로 흡수된다. 권위라는 포장지에 싸인 정보들은 비판적 사고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신념의 핵심부로 침투한다.
스마트폰을 든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스크롤을 내리는 그 순간들 속에서도, 수많은 편견들이 조용히 스며든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정보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댓글들이 만들어내는 에코 체임버 속에서 믿음은 더욱 견고해진다. 아니, 견고해진다고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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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가장 완고한 믿음은 도덕적 신념이다. 선악을 구분할 수 있다는 확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달콤한 만족감을 준다. 이런 신념들은 정체성과 결합되어 있기에 더욱 강력하다.
하지만 세상을 더 넓게 경험하면서 이 확신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본 친구들, 다른 계층 출신의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가치들이 실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산물이었음을 깨달았다.
선악의 경계선은 생각보다 훨씬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첫사랑을 잃는 것처럼 아픈 과정이다. 하지만 그 아픔 속에서 더 겸손해진다. 타인의 선택을 성급하게 재단하지 않게 되고, 내 판단의 불완전성을 조금씩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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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성채가 무너지는 결정적 순간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오랜 연인과의 이별. 그 과정에서 나는 얼마나 순진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착각하고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는지를 깨달았다.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소유하고 싶을 뿐이었다. 이해한다고 믿었지만 실은 내 방식대로 해석했을 뿐이었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봤고, 어리석게도 기대와 환상을 투사했다.
사랑도 착각이었다면, 다른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이 착각하고 있을까. 마치 거대한 거울 앞에 처음 서는 것 같은 막막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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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성채가 무너진 자리는 폐허가 아니라 가능성의 들판이었다.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가 걷힌 새벽 바다처럼,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졌다.
가장 큰 변화는 질문하는 법이었다. 이전에는 답을 찾으려고만 했다면, 이제는 질문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정말 개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 정말 옳은 것인가.
질문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다움의 핵심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답이 없는 질문들이다. 끝없이 사유하게 만드는 질문들이 삶을 깊어지게 만든다.
무너진 믿음의 터 위에는 새로운 것들이 천천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른 건축법을 따랐다. 비판적 사고라는 정밀한 체로 정보를 걸러내고, 다양한 관점을 교차 검증하며, 무엇보다 불확실성을 품는 법을 배웠다.
완전한 답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그것이 가장 해방적인 깨달음이었다.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고, 정답과 오답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불완전한 정보와 제한된 시간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며, 언제든 그 판단을 수정할 용기를 갖는 것뿐이다.
모든 것을 해체하고 의심한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들을 하나씩 벗겨내다 보니 마지막에 도달한 것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선택이었다. 의미를 추구하겠다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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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의미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로는 존재할 수 없는 생명체.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포로다. 돈의 포로, 권력의 포로, 타인의 시선의 포로, 욕망의 포로.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무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의미를 찾고, 의미를 만들고, 의미를 발굴하는 일에 스스로를 맡기기로 한다.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려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충동이다.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사건들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파편화된 경험들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려는 의지다. 부조리한 세계에서도 끝까지 바위를 굴리는 인간의 존재론적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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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본래 무의미하다. 별들은 이유 없이 떠돌고, 행성들은 목적 없이 공전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무의미한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니까.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별자리를 만들어내고, 그 별자리에 신화를 부여하는 것처럼.
삽을 든 손이 여전히 떨린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의 이유가 달라졌다. 더 이상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떨림. 고고학자가 아니라 정원사가 되기로 한다.
의심하되 절망하지 않기. 해체하되 파괴하지 않기. 비판하되 냉소하지 않기. 이것이 내가 찾아낸 새로운 원리다. 믿음의 고고학은 결국 의미의 정원학으로 이어진다. 확실하지 않은 땅에 씨앗을 뿌리는 일. 그 씨앗이 언제 싹틀지, 어떤 꽃을 피울지 알 수 없으면서도 계속 물을 주는 일.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의심마저 의심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겨둔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겸손한 자유이자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