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if not
성매매를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매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산업이다. 다만 나와는 맞지 않는 옷이다. 마치 담배와 비슷하다. 누구나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는 기호품이지만, 나는 그 냄새를 역겨워 한다. 내 주변엔 흡연자가 있지만, 내게 권하지 않으면 괜찮다.
이건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다. 나는 오히려 내가 돈을 받아야 할 입장이라고 여긴다. 그게 뭐가 됐든, 내가 지닌 가치가 훨씬 존귀하고 소중하니까. 내가 가진 자산이 훨씬 희소하고 막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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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배설이라는 행위를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가장 평등하고 보편적인 생리 현상. 왕이든 거지든, 성인이든 범죄자든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 원초적인 욕구에 큰 지출을 감수하는 것, 이 지점에서 나는 이상한 거부감을 느낀다.
배설과 성욕, 둘 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현실이다. 그렇다면 화장실에서 배설물을 처리하는 것과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것,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둘 다 몸이 요구하는 생리적 필요의 해결이다. 그런데 왜 하나는 무료로 해결되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거액을 지불해야 하는가? 특히 나는 성적 욕구 해소에 그토록 많은 비용을 지불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어쩌면 내가 거부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순간 인간이 순전히 육체적 존재로만 환원된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영혼이나 정신, 품위 같은 것들이 잠시 뒤로 밀려나고 오직 생물학적 필요만이 전면에 나서는 순간들. 나는 그런 순간에 내 존재의 고귀함을 잃고 싶지 않다. 육체적 감염의 위험함과 역겨움은 둘째 치고, 영혼이 통째로 오염되는 기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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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괴테의 파우스트가 떠오른다. 파우스트는 지식과 권력, 젊음을 얻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넘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파우스트적 존재다. 한때 신성불가침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가격표를 달고 플랫폼에 진열된다. 몇 개의 하트와 몇 명의 팔로워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 우리는 모두 자신을 24시간 경매에 부치고 있다.
'영혼을 판다'는 표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해본다. 각 시대마다, 각 문화마다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 경계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가 그 사회의 정신적 품격을 결정한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많은 것을 제시해도 넘겨주지 않을 것들, 그것이 그 사람의 영혼의 지도를 그어준다.
영혼을 거래해버린 자는 무엇을 소유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안고 산다.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이반의 입을 빌려 탐구한 것처럼, 한번 시장의 논리에 내맡겨진 영혼의 무게는 어떤 보상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회복 불가능한 상실이다. 니체가 말한 "노예 도덕"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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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if not,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다니엘서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앞에서 한 이 말은 절대적 신념의 언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선언. 결과와 무관하게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고백. 이런 태도는 삶에 타협 불가능한 성역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지만 흔들리지 않는 원칙들의 영토.
나훈아가 재벌가의 거액 제안을 받고도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에 오라"고 했던 것, 어떤 부모가 수십억을 줘도 자녀를 팔지 않겠다는 본능적 거부감. 이런 순간들에서 인간의 품위가 드러난다. 품위란 아무리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내면의 견고함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선택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존재론적 근력 같은. 진정한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중심.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불가침의 영역. 그것이 품위의 진정한 근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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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절대 양보하지 않는 마지막 보루를 갖고 있다는 것. 아무리 달콤한 유혹을 제시해도 내주지 않을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당연히 이런 것들은 경제적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비효율적이고 때로는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들이다. 하지만 그 비합리성 속에서 인간의 존엄이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카뮈의 말처럼,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시지프스의 바위를 발견해야 한다. 실패와 좌절, 배신과 상처를 겪으면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선별하는 안목을 기른다. 어떤 이들은 평생을 살아도 그런 중심축을 찾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풍향에 따라 흔들리는 갈대로 남는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들의 목록은 짧을수록 좋다. 적고 깊을수록 더 진지하게 확신할 수 있고, 더 확실하게 지켜낼 수 있다. 맹세는 신성한 것이므로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남발된 다짐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이는 타인과의 약속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약속에도 적용된다. 내면의 법정에서 내린 판결은 그 무엇보다 엄중해야 한다.
그리고 품위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고독이라는 숙명을. 타협 불가능한 원칙을 고수하면,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실망시키게 된다. 때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따뜻한 기대를 차갑게 거절해야 하는 순간들,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선택들을 견뎌내야 한다. 이 모든 아픔을 감당할 각오가 있어야만 진정한 품위에 도달할 수 있다. 오직 허수아비만이 아무런 갈등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기술은 만 시간의 반복으로 체득되지만, 품위는 만 번의 상처로 형성된다. 그 상처들은 모두 선택의 결과다. 쉬운 길을 거부하고 어려운 길을 택한 결과들. 보들레르가 『악의 꽃』에서 탐구한 것처럼, 도덕적 경계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과 고통.
무엇보다 품위는 시험받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낸다. 우리 모두에게는 남들보다 높은 이상이나 독특한 취향, 고집스러운 원칙들이 있을 수 있다. 세상이 그것들을 허물고 평준화하려 할 때, 끝까지 방어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런 순간들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승리의 눈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켜낸 안도의 눈물을.
품위를 지닌 사람은 역설적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상처를 주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을 깊이 매혹시킨다. 대부분의 경우 품위는 싸울 줄 아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내적 주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물론 사소한 일이나 공허한 이념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가치, 존재 이유의 핵심에 있는 그것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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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의 품위는 어디까지 뻗어 있을까? 여전히 그 지도를 그려가는 중이다. 때로는 내가 지나치게 까다로운 건 아닌지, 혹은 세상을 너무 선악으로 나누어 보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완벽주의와 원칙주의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할 때가 많다. 삶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 앞에서 나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범위 안에서만큼은 여전히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등을 돌린다 해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나에게는 거래하지 않을 마지막 방이 있고, 그 방 안에서만큼은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다.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에 맞서는 용기. 모든 이가 '예'라고 할 때 홀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고독한 힘. 그 힘이 때로는 나를 외롭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나다운 나로 만들어준다. 그 자유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 그 힘 앞에서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이 된다.
그것이 나의 품위이고, 동시에 나의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