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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융한삶 Apr 30. 2024

졸업

한용운「님의 침묵」 · 고재종「첫사랑」 · 이형기「낙화」



어느날 월말 모의고사를 보다가

승준이가 울먹거렸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말해줄 수 있어?”


승준이는 한참을 뜸 들이다가

힘들게 입을 뗐다.


“여자친구랑 헤어졌어요.”


처음 썸 탈 때부터, 데이트 코스, 생일 선물, 영화 추천 등 지금까지 여러 조언을 해준 터라 

갑작스러운 이별 소식에 나 역시 꽤나 놀랐다.


“언제?”

“그저께요.”


“왜?”

“그냥 헤어지쟤요.”


여자친구 얘기만 나와도 행복하게 웃던 승준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어려웠다.


“뭘 해도 집중이 안 되고, 잠도 안 오고, 너무 무기력 해요. 이 기분을 없애려고 달리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고, 친구도 만나봤는데 계속 안 없어져요.”


나는 먼저 이성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너무 힘들면 일단 타이레놀을 먹도록 해. 물리적인 통증과 정신적인 아픔은 뇌의 같은 부위가 담당해. 즉 진통제가 마음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가려줄 거야. 지금 느끼는 힘듦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과정이야.


“왜 힘들어요?“


“일종의 금단 증상이야. 정말정말 재미있는 게임을 갑자기 못한다고 생각해 봐. 너무 하고 싶고 괴롭겠지. 똑같아. 매일 공급되던 신경 전달 물질이 갑자기 중단됐기 때문에 갈증을 느끼는 거야. 일종의 중독 상태지.”


“이 기분이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봐 무서워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반드시 괜찮아져. 하지만 시간이 필요해. 서서히 가라앉고 천천히 회복 돼. 2주에서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많이 편해질 거야. 약속할게.”


승준이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힘들겠지만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거야.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갔다고 해보자. 그곳엔 특별한 음식이 있는데, 입맛에 맞을지는 몰라. 정말 황홀할 수도 있고, 엄청 끔찍할 수도 있어. 그런데 이번이 아니면 평생 언제 다시 경험할 수 있을지 몰라. 어떻게 할래? 도전 해볼래? 하지 않을래?”


승준이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도전해 볼래요.”


“잘 생각했어. 사람은 해본 것과 못 해본 것 중 언제나 후자를 후회 해. 지금 그 감정이 소중한 이유는 결코 아무나 느낄 수 없기 때문이야. 만남이란 사건은 커다란 행운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 역시 나를 좋아하는 건, 지극히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 엄청난 기적이니까. 정말 슬프게도 평생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 ‘회자정리’, ‘거자필반’ 배웠지? 꽃이 피면 반드시 지고, 태어나면 반드시 죽듯,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이별이 있어. 안타깝지만 사랑과 이별은 한몸이야. 따라서 이별을 감당하지 않는 사랑은 반쪽 짜리야. 사랑부터 이별까지가 온전한 하나의 싸이클이니까.


봄에 벚꽃놀이 왜 갈까? 어차피 금방 지는데? 그래서 보러 가는 거야. 금방 지니까. 꽃이 사계절 내내 그 자리에 피어 있다면 굳이 보러 갈까? 사라지니까 소중한 거야. 변하니까 아름다운 거야.


그러니 마음껏 괴로워하고, 있는 힘껏 슬퍼해. 가능할 때까지 눈물 흘리고, 더 이상 아플 수 없을 때까지 아파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도 하지 마. 생각은 제어할 수 없어. 생각은 그냥 일어나는 현상이야.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려 하지 말고, 그 안에 푹 잠겨서 저절로 다시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 부디 그 시간을 온전히 누려.”


승준이는 조금 납득하는 것 같았다.






“이별이 원래 그래. 한쪽이 먼저 마음을 다 정리하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니까, 통보받은 쪽만 힘들어 보이지. 하지만 이별을 건네는 쪽이 의외로 더 힘든 법이야. 관계의 끝을 선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 오래 숙고하고, 마음을 결단하고, 오롯이 책임을 감당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존중해야 해. 그 친구의 정확한 속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야.


슬프지만 인정해야 해. 그리고 직시해야 해. 그 사람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이 사실을 수용해야 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연락하지 말고, 계속 친구로 지내려고 하지도 마. 정확히 관계를 끝맺는 법도 배워야 해.


그 사람을 원망하지도 말고,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도 하지 마. 그 사람은 그냥 자기 삶을 살아갈 뿐이야. 그러니 굳이 뭔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어. 그냥 응원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네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면 돼. 그뿐이야.”


승준이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고

2주쯤 지나자 웃음을 되찾았다.


도움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녀는 나에게

이별을 선고했다.






7년 반의 연애 끝에

우리는 헤어졌다.


깊은 구덩이 속에 씨앗처럼 담겨

미련, 원망, 한숨, 집착, 고집, 애증, 애련, 후련,

모든 감정을 곱씹고 곱씹으며

한참을 웅크려 있었다.


다신 건네지 못할 시를 쓰고,

어차피 보내지 못할 편지를 적으며,


거대한 아픔에 매일밤을 신음하고

잘잘못과 후회들을 반추하고 반성했다.


희생의 흔적과 고통의 파편,

권태의 얼룩과 사랑의 상처,

결속의 매듭과 믿음의 단서,

헌신의 조각과 성숙의 편린,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영위했고,

여러 공간에 함께 존재했다.


우리는

각자의 숨을 나눠 먹었고,

서로의 영혼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때론 힘들고 매번 행복했다.

가끔 버겁고 자주 황홀했다.

작게 불안하고 크게 위안했다.

종종 서운하고 매일 고마웠다.

조금 미워하고 많이 사랑했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네게 사랑받았고, 

너는 내게 사랑받았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그거면 됐다.


이윽고 내가 승준이에게 무심코 뱉었던 말들이 메아리 쳤다.

마치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건네기라도 한듯.


‘일종의 금단 증상이야.

반드시 괜찮아져. 하지만 시간이 필요해. 

힘들겠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거야. 

결코 아무나 느낄 수 없기 때문이야. 지극히 낮은 확률로 일어나는 엄청난 기적이니까. 

이별을 감당하지 않는 사랑은 반쪽 짜리야. 

사랑부터 이별까지가 온전한 하나의 싸이클이니까. 

사라지니까 소중한 거야. 변하니까 아름다운 거야. 

이별을 건네는 쪽이 의외로 더 힘든 법이야. 그러니까 존중해야 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직시해야 해. 그 사람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

.

.






씨앗처럼 웅크린 내 몸에

어느새 조금씩 새싹이 자라난다.


새옹지마.


요즘엔 자꾸 

운명에 기대게 된다.


지금 겪는 이별에

어쩌면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거듭거듭 설득한다.


그렇기에 이 시간을 함부로 사용하면

이별의 의미를 깨뜨리는 것을 알기에


조금 더 하루하루를

가득히 살아가려 애쓰는 중이다.






내가 피운 새싹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가지가 솟고, 잎을 펼치고,

언제가 꽃을 피우고, 결국에 열매를 맺겠지.


시간이 흘러

우리가 언젠가 우연히 다시 마주했을 때,


지금처럼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며,


사랑의 끝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했음에 감사하고,

사랑한 후에 해야할 일들을

해나가야겠다.






오래된 연인으로서 사랑했고,

부족한 인간으로서 미안했고,

함께 한 동료로서 고마웠다.


늘 많이 웃고, 항상 건강하기를,

늘 사랑받고, 오래 행복하기를,


우리가 이룩한 졸업을

 

온몸으로 진심으로

간절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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