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카페를 정리하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때, 지자체와 협업해 바다를 배경으로 한 명상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중 북라운지 공간인 책방을 함께 운영하게 되었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책방이라는 말에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떠올렸다.
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었는데 잔잔한 물결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소리는 마치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부드럽고 반복적이었다. 이 공간이 단순히 책을 읽는 장소를 넘어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고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성소가 되길 바라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가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책방의 컨셉은 바다와 자연을 온전히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벽면은 부드러운 나무로 마감했고 손끝에 닿는 촉감이 따뜻하고 안정감을 주는 원목의 책상과 의자를 놓았다. 바다를 향한 창가에 놓인 책상은 바람이 은은하게 스며들어 독서에 몰입하기 좋은 자리로 여기에 앉아서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이완되는 공간이었다.
책장에는 생태, 인문학, 소설, 에세이, 여행, 시집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구비했다. 방문객들은 좋아하는 장르의 책을 읽거나 우연히 눈에 들어온 제목에 마음을 빼앗겨도 좋았고 어떤 책이든 평온한 바다와 함께하는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바다와 자연이 주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장소가 되어가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작은 섬과 그 뒤로 물드는 노을은 독서의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 주었다.
책방 문을 열고 캠핑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지나가는 분들이 "와 이런곳에서 일하면 매일 행복하겠어요" 하고 이야기를 하곤했다.
바다의 소리와 냄새,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다정하게 어우러지는 공간이자 바다만큼 깊고 넓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고 책방을 운영하면서 가장 큰 기쁨은 사람들이 여유롭고 행복한 모습으로 머무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맨발로 모래를 밟고 바다의 파도와 바람을 느끼며 읽는 책은 그 자체로 특별했다.
책방이 자리한 해변에서는 바다치유명상 프로그램이 열렸다. 파도가 밀려오고 물러가며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리듬은 명상의 배경으로 완벽했다. 이 프로그램은 전라남도 생태관광사업으로 교육청과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의 요청에 따라 단체로 진행되었으며 참여자들에게 심신의 긴장을 완화하고 내면의 평화를 되찾는 치유의 시간을 제공했다. 자연의 치유력을 활용한 바다 명상은 파도 소리의 리듬을 호흡과 연결시켜 몰입감을 높이고 넓은 수평선이 주는 개방감 속에서 감정의 해방과 성찰을 돕는다. 청각, 시각, 촉각을 자극하는 다감각적 경험은 명상을 더 깊이 있게 만들며 도시의 분주함에서 벗어난 고요한 환경은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책방에서는 치유를 주제로 한 미디어아트 전시도 진행되었는데 전시 공간은 관객들이 작품을 각자의 방식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내면을 탐구하는 여정을 돕는 역할을 했다. 한 명씩 공간에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작품 감상 후에는 해변에서 에프터 명상과 다도가 이어졌다. 바다를 마주하며 차를 나누는 고요한 시간은 명상의 여운을 확장시키고 자연과 사람의 연결감을 깊게 만들어 주었다.
한번은 한 할머니께서 우연히 오셨다가 작품을 감상하시고는 다음날 친구분을 데리고 다시 방문하신적이 있었다.
"태어나서 미디어아트라는걸 처음봤는데 너무 감동적이여서 친구에게도 보여주고싶어서 데려왔어요."
젊은 사람들이 봐도 대중적인 작품은 아니었는데 백발의 할머니께서 두번이나 보러 찾아주시다니 너무나 뜻깊은 순간이었다.
이 공간은 치유와 재발견의 시작점이었다. 바다와 책방, 명상 프로그램이 어우러진 경험은 사람들에게 삶을 다시 마주할 용기와 평화를 선사하며 나중에 문화예술발전기여 표창까지 받게된 감사한 공간이었다. 지금은 주된 활동이 숲치유명상으로 옮겨졌지만 바다와 그 공간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특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방을 운영하기 전에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 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다짜고짜 "마담! 여기 쌍화차 한잔 내와봐."라고 소리치며 여자 손님들에게만 시비를 걸던 할아버지, 질문을 가장해 불쾌한 말을 슬쩍 던지는 아저씨, 그리고 이유도없이 민원을 넣겠다고 협박하던 개저씨까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이어졌다. 해수욕장이라는 위치 탓에 관광객들이 주로 찾았고, 책방을 매점으로 착각하고 들어오는 일도 많았다. "여기 커피 안 팔아요?"라는 질문은 거의 매일같이 들려오며 좋은 마음으로 무급 봉사로 운영했던 공간이었지만 피로가 쌓여갔다.
그럼에도 책방은 따뜻한 기억을 선물해주었다. 나이가 아흔에 가까운 어르신이 책을 읽고 직접 손편지를 쓰며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간 날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책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진심을 전해준 분들의 마음은 큰 위로였다. 그런 순간들은 책방을 운영하며 얻은 소중한 보람이자 의미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현실과 부담 속에서 나는 이 공간을 계속 이어가기보다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 책방지기는 그만하기로했다.
지금은 문화해설사분들이 이어받아 운영하며 방문객들에게 여전히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 책방에서의 경험은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할 용기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