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 남은 이름
제15장. 작게 남은 이름
봄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천천히, 조용히, 마치 무엇을 오래 기다린 것처럼.
나는 수선소 창문을 닫고, 고양이 무늬 커튼을 살짝 들춰 밖을 내다봤다. 안개가 내려앉은 골목길에 익숙한 발소리가 묻혔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하얀이.”
“...비가 생각보다 오래 내리네요.”
그녀는 우산을 접으며 들어섰다. 젖은 어깨를 툭툭 털었지만, 표정은 어딘가 어두웠다. 평소의 밝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꺼져 있었다.
“괜찮아요?”
나는 커피포트에 손을 얹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망설이는 듯 입술을 꼭 다물었다. 말없이 가방을 꺼냈고, 그 안에서 작은 종이 상자를 꺼냈다.
“...이거 수선 가능할까요?”
상자 안엔 작은 인형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기 곰 모양, 낡은 헝겊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인형을 보는 순간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오래된 기억 한 켠에서 본 듯한.
“이 인형, 누군가의 이름이 붙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은, 어디에도 이름표가 없어요.”
하얀이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커피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빗방울처럼 고요했고, 빛을 머금지 않은 회색이었다.
“제가... 다섯 살 때였어요. 보육원에 있던 시절. 엄마는... 없었고, 아빠는... 거의 기억나지 않아요.”
그녀의 말은 조심스러웠고, 숨결처럼 가벼웠다.
“그때 제 곁엔 항상 이 인형이 있었어요. 이름은 ‘하루’였죠. 저만의 이름이었어요. 아이들이 저를 놀릴 때도, 그 인형한테만 말했어요. ‘괜찮아, 하루가 있으니까’라고...”
그녀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웃어보였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친구가 없었어요. 다들 가족이 찾아오는 날이면 저는 혼자였죠. 하루는 늘 제 옆을 지켜줬어요. 누군가 저를 밀치거나 놀릴 때도, 저는 하루한테만 속삭였어요. 하루야, 괜찮지? 우린 서로 있으니까.”
하얀의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어느 날이었어요. 한 부부가 입양 상담을 하러 왔어요. 저는 몰래 복도에서 지켜보다가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 하루를 꼭 껴안았어요. 제발 나를 데려가달라고, 이번에는 버림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죠.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하루가 사라져 있었어요. 선생님들은 ‘어지러웠으니까 치운 것’이라고 했지만, 저는 알아요. 누군가가 그 인형을... 가져갔다는 걸요.”
나는 말없이 인형을 손에 쥐었다. 한쪽 귀는 닳아 있었고, 단추를 달았던 자리는 올이 나가 있었다. 세월이 오래된 헝겊은 색을 잃었지만, 그곳에 남은 감정은 선명했다.
“그날부터 저는 다시 혼자가 되었어요. 하루마저 빼앗겼으니까요. 그 이후로 어떤 인형도 가지지 않았어요. 누군가에게 또 빼앗길까 봐. 이름을 붙이지도, 다가가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우체국 옆 벼룩시장에서 이 인형을 봤어요. 단추가 하나 떨어져 있었고, 귀가 닳아 있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에 올리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어요. 이게 ‘하루’라는 걸 직감으로 알겠더라고요.”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하얀 씨와 함께 지내시던 할머니는 어떤 분이에요?”
하얀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말했다.
“할머니는, 저를 입양해주신 분이에요. 엄마가 되어준 분이죠. 그날 하루를 잃어버리고 며칠을 울고 있는데, 어떤 분이 찾아오셨어요. 저를 보고 웃어주셨고, 그날 처음으로 저를 꼭 안아줬죠. 그분이 지금의 할머니에요. 저에게 ‘너는 내 딸이다’라고 말해주신 분이었어요.”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어요. 가족이라는 건, 누가 먼저 다가오느냐의 문제라는 걸요. 할머니는 제가 혼자 있던 저녁에도 늘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비가 오는 날이면 꼭 제 손을 잡고 ‘하얀아, 비가 와도 우리는 함께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해주셨죠. 그래서 저는...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얀은 말을 끝내고 눈을 감았다. 마치 그 순간의 따뜻함을 다시 느끼는 듯,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 인형, 이름표를 다시 달아줄까요?”
하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날 밤이 깊어갈수록 나는 떨어진 단추를 정성껏 꿰매고, 귀 끝에 부드러운 천을 덧대며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였다. 손끝마다 그녀의 과거와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자수실로 이름을 새겨넣었다.
Haru.
다음 날, 하얀은 인형을 받아 들고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땐 너무 작아서... 왜 버림받았는지, 왜 사랑받지 못했는지 몰랐어요. 근데 지금은 조금 알아요. 버려진 게 아니라... 그냥 헤어졌던 거라고. 다시 만났으니까.”
그녀는 인형을 꼭 껴안고 속삭였다.
“이제 하루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그친 오후, 하얀은 창밖을 바라보며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녀의 얼굴엔 오래된 슬픔과 함께 아주 작은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
“사장님, 고마워요. 이제 제 하루가 다시 시작된 것 같아요.”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수선 기록장에 나는 짧게 적었다.
[기록 38]
한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인형에게 건넸고,
한 여자는 잃어버린 하루를 다시 찾았다.
그 이름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마음도 아주 조금, 꿰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