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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인형극의 마지막 무대

by Liar

제14장. 인형극의 마지막 무대


“저기... 문, 열려 있나요?”

종소리가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낯선 목소리. 나는 재봉틀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입구에는 키가 작고 어깨에 가방을 멘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얼굴엔 웃음기가 있었지만, 눈 아래 그늘은 꽤 깊었다.

“네, 들어오세요.”

그녀는 문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손에 들린 작은 종이봉투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여기... 혹시, 인형도 수선하시나요?”

하얀이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갔다.

“네. 인형도 잘 꿰매요. 많이 다쳤나요?”

여성은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손가락 인형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닭, 개구리, 돼지, 코끼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간 헤진 곰 인형 하나. 인형들은 손에 끼우는 형태였고, 곳곳이 닳고 찢어져 있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 보여주던 인형극 도구들이에요. 올해까지만 쓰고 그만두려고 했는데요...”

그녀는 말을 이으려다 살짝 머뭇거렸다. 하얀과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 친구들하고 마지막 공연을 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부탁드릴게요. 조금만, 조금만 예뻐 보이게 해주세요.”

나는 다섯 인형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털이 벗겨지고, 바느질이 터진 부분들. 세월을 품은 상처였다. 손끝으로 인형을 만지자, 그 안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인형들... 이름이 있나요?”

하얀이가 물었을 때, 선생님은 인형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손바닥에 올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한 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몽실이, 또또, 꼬꼬맘, 뽀야, 그리고... 차미.”

마지막 이름을 말할 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 작은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얘네는...단순한 인형이 아니에요. 제 첫 아이들이에요.”

그녀는 먼 데를 바라보듯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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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부임지였어요. 폐교 직전의 시골 유치원. 칠판엔 오래된 분필 자국이 가득했고, 교실 바닥은 한겨울에 난방도 잘 안 됐어요. 장난감 하나 변변치 않았고, 아이들은 늘 서로를 때리거나 울기만 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갈라졌다.

“그 아이들, 다섯이었어요. 말이 느린 아이, 몸이 약한 아이, 부모 없이 외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 다들 어디론가 자꾸 숨어버리려는 아이들이었죠.”

그녀는 한 손으로 ‘차미’를 쥐고, 무릎 위에 얹었다.

“제가 뭘 해줄 수 있을까... 그때 처음으로, 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천 조각을 모으고, 밤마다 바느질을 했어요. 바늘이 손끝에 박히기도 했죠. 근데요, 그 인형들이 완성되고 나서 처음으로 아이들이 웃었어요. '몽실이 안녕!' 하고 인사하는데... 그 순간, 제 마음이 무너졌어요. 아이들이 처음으로 눈을 맞춰준 거였어요.”

하얀은 조용히 숨을 삼켰고, 나는 가만히 실 한 타래를 말았다.

“그날부터 매일, 작은 인형극을 했어요. 몽실이는 용감했지만 외로웠고, 꼬꼬맘은 무서워도 친구를 먼저 감쌌죠. 아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인형에게 투영했어요. 말 대신 인형을 움직였고, 인형이 대신 울었고...”

그녀는 조용히 웃었지만,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차미는...그 아이였어요. 아무 말 없이 나뭇가지만 주워 오던 아이. 늘 혼자였던 아이. 어느 날, 제 손에 있던 차미를 조용히 가져가더니 교실 구석에서 혼자 인형극을 하더라고요. 인형이 말을 했죠. ‘나는 엄마가 없어도 괜찮아.’ 그 순간... 저는 울고 말았어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들, 지금은 다 성인이 됐어요. 해마다 편지를 보내요. 그중 하나는 작년에 편지에 이렇게 썼어요. ‘선생님, 저는 지금도 혼자 울고 싶을 땐 몽실이랑 얘기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은 언제 하세요?”

“일주일 뒤요. 아이들과의 마지막 수업 날이에요. 새로 오시는 선생님에게 아이들을 넘겨주기 전에,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이야기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순간,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다시 꿰맬 수 있을까요?”

나는 대답 대신, 인형들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날 오후, 수선소에는 평소보다 더 조용한 온기가 감돌았다. 하얀은 커다란 쟁반 위에 다섯 인형을 하나씩 올려두고, 실 색깔을 맞췄다.

“푸르리는 초록실, 꼬꼬맘은 빨강. 꿀꿀이 공주는... 이 핑크실이 딱이에요.”

나는 몽실이를 손에 올렸다. 털이 다 닳고, 눈 하나가 빠져 있었다. 바느질 자국은 이미 몇 번이나 덧대어진 흔적이 있었다.

“이 인형들이... 아이들 손을 거치며 몇 번의 울음과 웃음을 들었을까요?”

하얀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꿰매는 일은, 실보다 마음이 더 필요하죠.”

하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거잖아요.”

그날 밤, 나는 하얀이에게 작은 제안을 했다.

“우리, 공연 날 몰래 가볼까요?”

“진짜요? 선생님한테 말씀드리면 놀랄 텐데요.”

“말 안 해도 괜찮죠. 조용히 보고만 오면 되니까.”


공연 날 아침, 우리는 유치원 마당 밖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철제 울타리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천막 아래,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선생님. 그녀는 손에 익숙한 인형들을 끼운 채 등장했다.

“얘들아, 오늘은 선생님과 마지막 이야기 나누는 날이에요.”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선생님은 꼬꼬맘을 손에 끼우고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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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꼬꼬맘이야! 오늘은 아주아주 특별한 친구들을 데리고 왔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한 마리씩 등장하는 인형들. 손가락 인형들이 꼭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얀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천막 아래 무대 위. 첫 번째로 등장한 건 개구리 또또였다.

“안녕! 나는 또또야! 그런데...오늘은 좀 이상해. 친구들이 나랑 놀지 않으려고 해.”

곧이어 꼬꼬맘이 등장했다. 하얀이 맡았던 인형이었다.

“왜냐하면, 또또가 어제 내 물을 엎질렀잖아!”

“그건...실수였어...”

두 인형이 서로 등을 돌리자, 아이들 사이에서 속삭임이 들렸다.

“앗싸 싸운다...”

“화해해~!”

그때, 가장 작은 인형 차미가 조심스레 나왔다. 코끼리 인형이었다.

“싸우지 마. 나도 예전에 친구랑 싸웠었는데, 그땐 아무 말도 안 해서 더 멀어졌어.”

차미의 말에 또또가 고개를 숙였고, 꼬꼬맘도 한 발 다가섰다.

“미안해. 난 그냥 속상해서 그랬어.”

“나도...다음엔 조심할게.”

두 인형이 손을 맞잡는 순간, 아이들 중 하나가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친구 됐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몽실이는 다친 친구를 보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진짜 친구는, 마음이 아플 때 옆에 있어주는 거래.”

그 말이 끝나자, 무대는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박수를 시작했고, 아이들의 손뼉 소리가 천막을 울렸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다섯 인형을 나란히 세우고 말했다.

“이 다섯 친구는 이제 각자의 길을 가지만, 서로의 마음속엔 언제나 함께 있을 거예요. 그러니...우리도, 잘 지내기로 약속할까요?”

“네에에에!”

아이들의 대답은 맑고 선명했다.

“코코가 눈빛이 달라졌어요. 확실히, 우리 실이 좋긴 좋아요.”

나는 웃음을 참았다.

몽실이는 마지막에 등장했다. 바느질 자국은 감춰졌고, 귀에는 작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얘들아, 이 곰돌이 기억하지? 몽실이야. 선생님이 처음 왔을 때부터 함께한 친구란다.”

아이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몽실이 눈 새 거 됐어요!”

다른 아이는 몽실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선생님의 눈가에 무언가 반짝였다.

“얘들아, 몽실이한테 인사하자. 잘 지내라고, 고맙다고 말해줄래?”

아이들은 일제히 말했다.

“몽실이야, 고마워! 안녕!”

그 말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을 감추듯 고개를 숙였고, 손에 끼운 인형으로만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공연이 끝난 뒤,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가고 무대 아래가 조용해졌을 때였다. 선생님은 잠시 무대를 정리하다 말고, 눈을 닦으며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혹시... 두 분,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우리는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참 말이 없다가, 천천히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리고 저 자신에게... 마지막 무대를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어주셔서요.”

하얀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희는 그냥 꿰맸을 뿐이에요. 선생님이 이미 마음을 다 꿰매놓으셨잖아요.”

그녀는 웃음 반, 눈물 반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몽실이를 꿰매는 동안, 제 마음도 덧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두 분 덕분에요.”

그 짧은 대화는 오히려 그날 무대 위 어떤 장면보다 깊은 울림이었다.

그날 저녁, 수선소로 돌아온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하얀은 다식 상자에서 조용히 과자를 꺼내며 말했다.

“사장님. 오늘은 진짜... 마음이 좀, 찡했어요.”

“수선도... 공연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선 기록장의 한 장에 이렇게 적었다.


[기록 37]

인형은 말하지 않지만, 어떤 목소리는 천을 타고 전해진다.

찢어진 부분을 꿰맬 때마다, 그 속에 담긴 기억도 하나씩 되살아난다.

몽실이는 다시 아이들 앞에 섰고, 그 작은 무대 위에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작별은 슬펐지만, 실로 엮인 마음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인형극의 마지막 무대이자, 누군가의 기억이 이어지는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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