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못한 목소리
제12장. 전하지 못한 목소리
우리는 마을 어르신들 한 분 한 분의 인사를 받으며 수선소로 돌아왔다. 작별 인사는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은 오래 남았다.
이틀 동안의 출장 수선이 끝나고, 다시 가게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공간인데도 어딘지 낯설었다. 가게 안의 공기는 여전히 따뜻했고, 실 한 타래도 제자리에 있었지만, 마음 어딘가는 약간씩 어긋난 듯한 느낌이었다.
“사장님, 다시 여기 돌아오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분명 우리 가게인데, 살짝... 생소한 느낌이에요.”
하얀이가 커피포트를 올리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잠깐 쉬었을 뿐인데, 감정은 참 빨리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택배를 보내기 위해 하얀에게 심부름을 부탁했다. 하얀은 신이 난 얼굴로 봉투를 들고 우체국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자 하얀이 급히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른 표정, 두 눈에 뭔가를 발견한 사람 특유의 빛이 번졌다. 그녀는 문을 닫자마자 나를 향해 다가왔다.
“사장님,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그 앵무새요, 계속 같은 말만 해요.”
나는 재봉틀에서 실을 끊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앵무새요? 갑자기 무슨 얘기예요?”
하얀은 양 볼이 겨울바람에 발갛게 상기된 채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우체국 앞에 할머니 한 분 있잖아요. 늘 벤치에 앉아 계시는 분. 그분 옆에 앵무새 한 마리 있는 거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동네에서 유명하잖아요. 가끔 지나가는 사람한테도 말 거는.”
“맞아요. 그런데 오늘은 진짜 이상했어요. 계속 ‘미안해, 아들아’라는 말만 반복하는 거예요. 말투도 이상할 정도로 진지했어요. 무슨 말을 전하려는 느낌이랄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평소에 들은 말을 흉내 낸 걸 수도 있죠. 앵무새는 그런 거 잘하니까요.”
하지만 하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고, 진지했다.
“아니에요. 그냥 흉내가 아니에요.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말이 진심처럼 느껴졌어요. 마치 계속 누구한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처럼요.”
그날 이후 하얀은 우체국을 몇 날 며칠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는 반쯤은 장난처럼 웃었지만, 그녀는 작은 수첩까지 꺼내 들며 메모를 해오기 시작했다. 앵무새의 말들을 하나하나 적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뒤, 하얀은 수첩을 펼쳐 보여주었다.
“보세요. 사장님. 이건… 그냥 반복하는 게 아니에요.”
하얀의 글씨로 기록된 앵무새의 말들은 다음과 같았다.
‘미안해, 아들아’
‘장롱 뒤에 있어’
‘나 때문이 아니야’
‘그때 그 말, 거짓이 아니었어’
‘나중엔 알게 될 거야’
“이건.. 메시지예요. 누군가 전하고 싶었던 말을 이 앵무새가 대신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말없이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기록된 말들이 가볍지 않았다. 저 문장들이 단순한 흉내라면 왜 하필 그런 말들일까.
“혹시.. 장롱 뒤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 본 적 있어요?”
“아직이요. 할머니께서 앵무새 말들을 다 못 알아 들이신 것도 있는 것 같구.. 제가 괜히 말씀드리기도 그렇고 해서요”
하얀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냥... 같이 가주실래요? 사장님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날 오후, 우리는 우체국 앞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는 잔잔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하얀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오늘도 여기 계시네요.”
앵무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낮고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아들아..” 앵무새의 목소리는 멍하니 울리는 메아리처럼, 한참을 가게 안에 머물렀다.
그 순간, 할머니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눈앞에 먼 과거가 스쳐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 앵무새, 우리 영감이 키웠던 거예요.”
할머니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원래 말도 많지 않은 양반이었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이 앵무새한테 말을 걸곤 했죠. 술 한 잔 걸치고 나면 늘 뭔가 중얼거리곤 했어요. 나중엔 그 말들만 반복했어요. ‘미안해, 아들아.’ ‘내가 그랬어.’ 같은 것들…”
그 말들을 앵무새가 모두 기억하고,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드님과는... 사이가 멀어지셨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아주 무겁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예요. 그 애는 말수가 없었고, 아버지랑은 늘 부딪히기만 했죠.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선 더더욱...”
“그 애는 어릴 때부터 말이 적고, 혼자 조용히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낡은 라디오를 뜯어 고치기도 하고, 종이로 도시를 만들기도 하고. 그런데 그 양반은 그런 걸 못 참았죠. 아들이 책을 보면 ‘그딴 건 배고프면 아무 소용도 없다’고, 손으로 흙을 만져야 사람이 된다며 호통을 쳤어요.
한 번은 중학교 때였나... 아이가 도서관에서 상을 받았다고 자랑하러 왔는데, 그 사람은 얼굴 한 번 안 들고 말하더군요. ‘책으론 밥 못 벌어. 장인은 손이 기억하는 거다.’
그날 저녁, 아들이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무언가를 만들었는데, 그게 아버지를 위한 도장함이었어요. 나무를 직접 깎고, 서툰 손으로 자개까지 붙였죠. 근데 그 사람은 도장함을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옆으로 밀어놨어요.
그 애가 그날 이후로는 더 이상 뭔가를 만들지 않더라고요. 그냥 조용해졌죠. 그리고 조금씩 멀어졌어요.
나중엔 대학도 혼자 알아보고, 집도 안 알려주고, 몇 년째 연락이 없어요. 아마… 그 사람 떠난 뒤에도, 여전히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죠.”
하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만히 앉아 앵무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혹시 장롱 뒤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할머니는 고개를 젓더니, 이내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오래된 주택의 안방 한켠, 장롱은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무거운 나무 장롱은 쉽게 밀리지 않았고, 우리는 힘을 모아 그것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그 틈 사이로, 한 낡은 상자가 드러났다.
상자 안에는 누렇게 바랜 편지들이 차곡차곡 접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냈어야 했지만 결국 보내지 못한 마음들.
아들에게 전하지 못한 말, 남편이 남긴 미안함, 그리고 엄마로서의 후회.
‘그때 널 나무란 건,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었단다.’
‘넌 네 방식대로 잘 살아갈 줄 알았다.’
‘어쩌면 내가 너무 늦게 알았나 보다.’
편지를 읽는 내내,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말은 없었지만, 눈빛으로 다 전해졌다. 하얀은 조용히 할머니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할머니, 이거... 앵무새가 대신 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앵무새의 케이지 문을 열었다. 새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사람, 그렇게 미안했구나...”
며칠 뒤, 나는 그 편지들을 얇은 실로 꿰맸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다듬고, 작은 노트로 엮었다. 겉장은 자개 무늬의 종이로 감쌌고, 맨 앞장에는 이렇게 적었다.
‘전하지 못한 말, 누군가의 날개에 실려 날아갑니다.’
며칠 후, 앵무새는 또 다른 말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조금은 낯선, 그러나 확실히 따뜻한 말이었다.
“고마워, 아들아.”
하얀이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목소리가 달라졌어요. 전해졌네요. 진짜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수선은 바늘도 실도 쓰이지 않았지만, 마음의 실밥을 하나하나 다시 꿰맨 일이었다.
[기록 36]
때로는 말보다 말의 잔향이 오래 남는다.
그 잔향이 새처럼 날아와 마음을 툭 건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듣지 못한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지도 모른다.
전해지지 못한 진심은 결국, 누군가의 입을 빌려 돌아온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조용히, 아주 천천히 꿰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