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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마음이 쉬는 곳

by Liar

제11장.마음이 쉬는 곳


“밥은 먹고 가야지. 먼 길 왔는데 어딜 그냥 보내.”

할머니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따뜻했다. 말끝에 힘이 실렸지만, 그 안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앉으라는 은근한 정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할머니의 말에 눌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따뜻한 밥상 냄새에 이끌려 하루 묵기로 했다. 마당 끝 텃밭에서 따온 쑥국, 된장찌개, 고등어조림, 갓 부친 달걀말이.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밥상이었다.

“와... 역시 할머니의 반찬은 백과사전이에요.”

하얀은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두 손을 모아 감탄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맨날 빵만 먹는다며? 이게 밥이지.”

할머니는 흐뭇하게 웃으며 우리 앞에 깻잎장아찌를 더 얹어주었다. 밥상 위로 퍼지는 김의 향에 마음까지 데워지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산책 겸 마을 어귀까지 걸어 나갔다. 작은 마을회관 앞 평상에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있었다.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할아버님들은 고구마를 구워 나누어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어르신들이 모여 있었다. 몇몇 할머님들은 뜨개질을 하거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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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도시에서 온 청년들이야?”

“하얀이가 데려온다는 그 수선사 양반이 이 사람인가 보네?”

할머님들이 웃으며 우리를 향해 손짓하셨다.

“얘가 그 유명한 수선사. 마음도 같이 꿰맨다더라.”

어르신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마음을 꿰맨다고?”

“그럼 이 노환도 좀 꿰매주면 좋겠네.”

“하하하! 그건 병원이 가야지, 이 양반아.”

웃음이 번졌고, 긴장은 풀렸다. 그때 누군가가 살며시 낡은 천 가방 하나를 꺼냈다. 손잡이는 삐뚤게 꿰매져 있었고, 천은 해지고 바랜 흔적이 깊었다.

“이거, 우리 남편 살아 있을 때 늘 들고 다니던 가방이에요. 그냥 버릴까 하다가… 혹시 고쳐지면...”

나는 조심스레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은 조금 걸릴 수도 있지만요.”

그 말을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의 입이 열렸다. 고장 난 벽시계, 천이 닳은 방석, 심지어 깨진 안경집까지.

“어르신들,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가 잠깐씩 들러서 필요한 거 받아가도 될까요?”

하얀이가 두 손을 모으고 물었다. 어르신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 와?”

“내일 아침 되겠니? 그때면 내가 양은 주전자도 보여줄 수 있는데...”

“나는 예전에 쓰던 라디오 커버 좀 찾아놔야겠다.”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회관 안은 어느새 마치 동네 벼룩시장 같아졌다. 하얀이가 웃으며 내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사장님... 우리, 이대로 도망갈 거 아니죠?”

“글쎄요. 이미 이만큼 맡았으니, 며칠은 묵어야 할 것 같은데요.”

“좋아요. 저, 여기 좀 더 있고 싶어요. 할머니 동네, 소리도 따뜻해요.”

그 순간, 내가 처음 가게 문을 열고 수선을 시작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누군가의 기억을 붙잡고, 그것을 손으로 꿰맨다는 일. 이곳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다가왔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대청마루에 부서져 내렸다. 먼지마저 반짝이는 날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아침을 먹고, 천으로 둘러맨 손수레를 끌며 마을을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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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오늘 우리... 수선 수거 트럭이에요. 이동 가게!”

하얀은 수레를 끌며 경쾌하게 말했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보자기에는 ‘동네 수선소’라고 크레용으로 쓴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첫 번째 집은 돌담길 끝에 있는 낡은 초가였다. 대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슈, 거기 하얀이냐?”

작은 몸집의 할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양 손엔 낡은 수첩과, 헝클어진 털실로 만든 모자가 들려 있었다.

“이거 말이여... 우리 손녀가 중학교 졸업하고 처음 떠난 수학여행 때 사다 준 거요. 지금은 대학생인데, 저도 이젠 머리가 시려서 이 모자가 꼭 필요하거든. 근데, 구멍이 나서... 그것도 꼭 정수리 한가운데에.”

하얀이가 모자를 받아 들고는 숨을 참으며 웃음을 참았다.

“정수리는 너무 노출되면 안 되죠. 감기 걸려요.”

“그러니까 말이여. 정수리가 제일 문제여.”

나는 그 자리에서 고칠 곳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우리 앞에 쪼그려 앉더니 슬며시 말했다.

“손녀한테는 말 안 했어요. 쓰레기통에 넣으려다가... 문득 생각났어요. 혹시라도 고쳐지면, 그냥... 혼자 쓸까 싶어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털실의 색은 많이 바랬지만, 실밥 하나하나에 손녀의 손끝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하얀은 한참 모자를 만지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손녀분 이름은 뭔가요?”

“은지요. 지금은 서울에서 취업 준비 한다고... 바쁘대요.”

“그럼 이건 은지 씨가 떠나기 전, 할아버지 정수리를 위해 남겨둔 마지막 방패네요.”

하얀의 말에 할아버지는 한참을 웃다가, 마당을 보며 작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소.”

우리는 모자를 조심스럽게 싸서 들고 나왔다. 다음 수선 물건은 고장 난 보자기 지퍼, 그 다음은 오래된 천 장갑, 그리고 누더기처럼 찢어진 누비이불이었다.

그날 하루, 손끝은 바빴고, 마음은 고요했다. 마을은 우리를 조금씩 품어주고 있었고, 그 품 안에서 수선이란 일은 단지 꿰매는 일이 아니라, 추억과 기억을 닦고 다듬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녁 무렵, 하얀이가 누비이불을 펴며 말했다.

“사장님, 저 이불요... 누가 봐도 너무 낡았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근데 이렇게 한 땀 한 땀 덧대다 보면요... 희한하게 마음도 덧대지는 기분이에요.”

나는 천을 만지며 대답했다.

“가끔은, 덧댄 자리가 원래보다 더 따뜻한 법이죠.”


우리는 한집 한집을 찾아뵈며 여러 가지를 수선하고 고치기 시작했다.

하얀이는 작은 수첩을 꺼내 들고 진지하게 기록했다. 수선 목록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찢어진 무명 앞치마, 실이 풀린 손뜨개 스웨터, 뚜껑이 닫히지 않는 쌀통까지.

“이건... 거의 동네 전체 리폼 프로젝트 아닌가요?”

내가 가볍게 농담하자, 하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출장 수선단 결성했어요. 단장님.”

“그럼 하얀 씨는 뭐예요?”

“부단장이요. 예쁘고 야무진.”

“그건 본인이 정하는 거예요?”

“그럼요. 시골에서는 셀프 임명제래요.”

다음 집에서 만난 김씨 아주머니는 이불 보퉁이를 꺼내오며 말을 아꼈다.

“이건 우리 막내가 군대 가기 전에 쓰던 거예요. 많이 낡았죠? 그냥... 그래도 이불이 말라서 그런가, 아직도 냄새가 나요. 애기 때 쓰던 그 샴푸 냄새 같은 거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은 이불을 받아들며 살짝 감싸 안았다.

“아직 따뜻해요. 분명 좋은 잠이 담겼던 이불이에요.”

그 말에 아주머니가 처음으로 살짝 웃었다.


이번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수선하기로 하고, 마당 한켠에 돗자리를 펴면서 시작됐다. 바느질 상자와 실타래들, 연장 도구들, 찜통에 덥혀 둔 옥수수 몇 개까지. 지나가던 개도 멈춰 서서 우리를 힐끔거렸다.

“사장님, 얘는 오늘도 구경만 해요.”

“그럴 리가요. 저기 옥수수 하나는 결국 저 친구 차지일 겁니다.”

예상대로였다. 옥수수 하나가 없어졌고, 멀찍이 앉은 강아지는 만족스럽게 입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점심 무렵,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둘 구경을 왔다.

“어머, 이건 그 때 쓰던 양은 도시락이잖아?”

“내 거! 그건 내 거야! 중학교 땐가, 소풍 갈 때 썼던 거!”

“자자, 서로 기억나면 인증샷 하나 찍고 가세요.”

하얀이가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누군가는 쑥떡을 가져왔고, 누군가는 장독대에서 꺼낸 오이장아찌를 내왔다. 어느새 작은 잔치가 벌어졌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고장 난 벽시계였다.

“이 시계요, 남편이 살아있을 때 맞춰놓은 시간이에요. 이후로 한 번도 못 고쳤는데... 돌아갈까요?”

하얀은 조심스레 벽시계를 열어보며 말했다.

“아직 괜찮을 것 같아요. 안의 바늘만 살짝 조정하면요. 그리고... 이 시계는 시간을 멈춘 게 아니라, 누군가 기다린 시간이 아닐까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품에 꼭 안았다.


저녁 무렵,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돌아갔고, 우리는 남겨진 물건들을 정리하며 마루에 앉았다.

하얀이가 말없이 풀을 입에 물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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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오늘 하루... 좀 많이 좋았어요.”

“나도요. 도시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던 감정들이 많았어요.”

“여긴 마음이... 땅에 닿아있는 느낌이에요. 허공에 떠 있지 않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보다 더 무거운 수긍이었다.

그날 밤, 별이 맑게 떠올랐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공기와 함께 뭔가 오래된 이야기들이 스며들듯 들어왔다.

우리의 수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진짜 수선은,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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