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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손끝에 남은 미안함

by Liar

제10장.손끝에 남은 미안함


“오늘은 바늘 대신 망치와 끌입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낡은 연장가방 속에서 정리된 도구들이 부스럭거렸다. 평소보다 무거운 짐이었다. 수선의 범위가 바뀐다는 건, 마음을 다루는 방식도 조금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사장님, 긴장하신 거 아니죠?”

하얀이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물었다.

“긴장보다… 생경한 감정에 가깝네요.”

나는 차 문을 닫으며 대답했다.

“와... 여기 공기, 진짜 다르네요.”

하얀이가 창문을 내리고 얼굴을 내밀었다.

“서울은 매연이랑 먼지가 섞인 공기고, 여긴... 말 그대로 바람이 숨 쉬는 느낌이에요.”

나는 말없이 웃었다. 들판에 남은 마른 억새가 흔들렸고, 굴뚝 하나에서 아주 옅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우리는 늦겨울의 시골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하얀의 외할머니 댁. 낮은 담장과 툇마루, 바람이 잘 드는 작은 마당이 인상적인 오래된 한옥이었다. 주변엔 고요한 산 능선이 걸려 있었고, 바람엔 아직 봄의 기척이 묻어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멀리 오느라 고생했어요. 우리 하얀이가 사장님한테 출장 수선 얘기 꺼냈을 때부터, 저에게는 부탁드린 이 장롱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리하게 오시라고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단지 제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먼저 장롱부터 볼 수 있을까요?”

할머니는 천천히 방 안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오래된 자개장롱 하나가 있었다.

그 장롱은 말 그대로 '기억을 담은 상자'같이 오래되어 보였다.

자개가 박힌 표면은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고, 학과 사슴, 호랑이 같은 동물 모양의 장식 일부는 떨어져 바닥에 놓여 있었다.

나는 장롱을 꼼꼼히 보다가 섬세한 이음새의 마디를 보면서 이 것을 만든 사람은 장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덜컥 겁이났다.

“이건… 함부로 고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할머니는 장롱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아이는요… 한 번도 버림받은 적이 없었어요. 대신, 너무 오래 혼자였죠.”

그 손끝에는 무언가 오래된, 그러나 아주 선명한 감정이 닿아 있었다.

할머니는 장롱 앞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장롱은 제 아버지가 만든 거에요. 가구 장인이셨죠. 피난 시절, 생계를 잇기 위해 목공일을 시작했지만, 그 손끝은 진짜였어요. 그런데 늘 집에 없었어요. 가족들의 품보다는 나무 냄새가 더 익숙했었겠죠.”

할머니의 목소리는 한 겹씩 얇게 꺼내지는 오래된 편지지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살 날이 얼마 없다는 말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죠.‘우리 딸에게 해 줄 수 있는게 없어요 여보... 당신이 순이에게 시집가기 전 장롱하나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라고 말이죠”

“그게 이 장롱이군요.”

“그래요. 아버지는 그날부로 일을 그만두셨죠. 밤낮없이 어머니를 간호하며 나무를 깎고, 자개를 하나하나 붙였어요. 그런데 장롱이 완성되어가면 갈 수 록 어머니는 점점 더 많이 쇄약해져갔어요.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밥도 먹지 않고 장롱 만드는 것에 열중했어요.”

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이 시리도록 마른 겨울 하늘을 바라보듯, 잠시 먼 곳을 보았다.

“장롱은 완성됐지만, 어머니는 끝내... 그걸 한 번도 열어보지 못했어요. 그게 제일 미안한 기억이에요.”

나는 장롱을 다시 바라보았다.

자개 조각들이 손가락 사이로 빛을 흘렸다.

“복원.... 한 번 해보겠습니다. 단, 완벽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기억을 지키는 데엔 문제 없도록 해보겠습니다.”

하얀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장롱에서 떨어진 조각들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루 옆, 햇볕이 잘 드는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조각들을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다.

“사장님, 얘는 겁 많아 보이는 노루 씨 같아요. 귀가 반쯤 접혀 있어서요. 분명 뭔가 놀라고 도망치다 털실에 걸린 거예요. 딱 그 표정이에요.”

“이 학은요, 공중에서 누구보다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척하지만... 사실 외로워서 내려앉고 싶은 거 아닐까요?”

나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웃음만 지었지만 하얀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쵸? 딱 그런 느낌이에요. 그리고 이 학! 왠지 까칠하고 우아하죠?”

“고개 각도가 아주 새침해요!.”

하얀과 나는 마치 오래된 동물 친구들을 하나씩 깨워내듯 장롱을 수선해갔다.

나는 바닥에 앉아 본격적으로 자개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조각들을 맞추는 일이, 그리움의 조각을 손으로 만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무너진 건 장롱의 일부였지만, 어쩌면 더 오래 전부터 금이 가 있었던 건 이 집의 시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개 조각은 손끝에서 미세하게 미끄러졌다.

마치 얼음을 손바닥에 올려둔 것처럼 차가웠고, 빛을 받으면 초록빛과 분홍빛이 번갈아 반짝였다.

“이건 단순한 복원이 아니구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교한 나무 틀 사이, 자개 조각은 마치 퍼즐처럼 맞아들어갔다.

빛에 따라 색이 바뀌는 자개의 결은 시간을 삼킨 듯 깊었다.

“이건 단순한 복원이 아니구나…”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장롱 한쪽 칸을 열다, 오래된 종이 접힌 느낌의 물체를 발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장롱 벽면 틈에 얇은 종이 한 장이 접힌 채 끼워져 있었다.

종이를 꺼내는 순간, 바스락, 하고 소리가 났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건조한 결, 그 결 사이로 먼지 냄새와 함께 잊힌 시간이 함께 묻어났다.

글씨는 삐뚤빼뚤했고, 그림 위의 크레용 선은 지워진 부분 없이 뚜렷했다. 시간이 지나도 마음만은 흐려지지 않았다는 듯이.

종이를 펼치자, 거기엔 서툰 글씨와 함께 아이가 그린 듯한 크레용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딸에게.”

그것은 편지였다.

내용은 간결하지만 울림이 컸다.

“우리 딸, 미안하다. 밥보다 일, 약보다 가구였던 내가

너의 유일한 ‘장롱’이었기를 바란다.

많이 추웠을 너의 겨울, 이 장롱 하나로라도 따뜻했으면 좋겠다.

네 엄마가 말한 마지막 소원이었다.

나는... 항상 미안했다. 너를 등진 채 나무를 다듬던 손이

너를 안아보지 못한 손이어서.

이 장롱 안엔 나의 미안함과 너를 위한 마음을 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편지를 하얀에게 건넸다.

하얀은 고요하게 읽고 있었다.

작은 바람결에도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얀은 편지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편지 속의 오래된 목소리가, 지금 이곳에 들리는 것처럼.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언가가, 늦겨울 바람보다 선명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장롱 안에 편지를 넣을 생각을 하다니… 마음이 진짜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나 봐요.”

수선이 끝나고, 우리는 장롱 앞에 나란히 앉았다.

해는 기울고 있었고, 마지막 햇빛은 자개 위에서 산산이 흩어져 무지갯빛 파편을 만들었다.

마치 장롱 안의 시간이, 빛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나는 그 빛 속에서 자개 학이 날갯짓을 하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그것은 진짜 움직이는 학은 아니었지만, 마음의 한 조각이 누군가에게 닿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멈춰 있지 않았다. 다만, 그 안에 있던 마음이 지금에서야 비로소 다시 펴진 것이었다.

하얀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잘한 거죠?”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건, 마음을 닫지 않게 해주는 수선이었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자개의 학이 미소 짓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져온 일기장을 펼치며, 오늘을 기록했다.


[기록 35]

장롱은 닫힌 물건이지만, 그 안에는 열리지 못한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그 마음에 손을 댔다. 조심스럽고 천천히,

어긋난 조각들을 다시 맞추며 말이다.

그날 바람은 따뜻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마음 하나는 분명히 덜 시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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