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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애국가와 고향의 봄

by 고요한밤

2004년 7월, 영국 런던 남서쪽에 위치한 크로이돈에서 지휘자 유병윤 씨가 이끄는 템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한국환상곡’(Korean Fantasy) 연주회를 열었다. 한영 수교 12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고, 1965년 7월 4일 런던 로열 알버트홀에서 안익태 선생이 직접 ‘한국환상곡’을 지휘하고 두 달 후 스페인에서 운명한 이후 영국에서 다시 연주된 적이 없다고 했다.


지휘자 유병윤 씨는 우리 가족이 다니던 런던한인교회의 지휘자로 활동 중이셨다. 영국인들로 모여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현재까지도 이끌고 계시며, 본인이 바이올린 전공이셨기에 음악적으로 아주 깐깐하신 분이셨다. 역사가 오래된 한인교회 특성상 성가대의 연령대는 아주 높은 축에 속했고, 인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소프라노 파트장 연세가 당시 80이셨을 정도였다.

주중 금요일 저녁 오래된 건물의 냉기 때문에, 엄마 따라와서 라디에이터 앞에서 놀던 네댓 살의 아들이 웅크리고 잠들 정도로 춥고 썰렁했지만, 각 파트 별로 끈끈한 뭉침이 있었고 거의 결석하지 않고 서로서로 챙기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주일 오후 예배와 친교가 끝난 후 추가 연습 시간이 있었는데, 원하는 음정이나 박자, 끝맺음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가능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연습시키는 지휘자 특훈 때문에 2시간 연습이 아주 고된 시간이었다. 그나마 집에 가고 싶어서 다들 억지로 억지로 그 기대 수준에 맞추고 겨우 귀가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본인이 추진하는 ‘한국 환상곡’ 연주회를 소개하며 마지막 애국가 합창 부분을 함께할 한인교회 연합성가대에 참여하라고 지시하셨다. 연합성가대의 연습시간은 절대 넉넉하지 않았고, 악보로 받아본 애국가 합창 부분은 이제까지의 소프라노 고음은 택도 없이 아주 괴성을 질러야 겨우 가능한 수준이었다, 겨우겨우 몇 번 맞춰본 게 다인데 드디어 연주회 날은 닥쳤다.

그날 행사에는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여사와 두 딸, 사위와 외손자 등 가족들이 스페인에서 특별 초대되었고, 스페인 변호사라는 외손자가 가족 대표로 인사를 했다. 미구엘 익태 안. 그는 얼굴도 못 본 외할아버지의 성과 이름을 본인의 이름으로 만들 정도로 외할아버지의 나라와 음악에 대한 존경을 인사로 전했다.


처음은 관현악의 서정적인 멜로디로 출발하여 일제 치하를 상징한다는 무거운 진혼의 멜로디를 거쳐, 마침내 광복의 기쁨이 분출되는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에, 뒷편에 앉아 대기하던 우리 혼성 합창단이 기립하여 장엄한 코러스 부분을 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우리가 아는 보통의 애국가와는 좀 다른 선율이지만, 어느새 청중들은 일어나 함께 따라 부르고 있었다. 비록 우리의 연습과 음정은 부족했지만, 오케스트라 덕으로 언뜻 듣기에 꽤 괜찮은 울림으로 커버되어 연주회장을 채우고 있었다.


끝없는 기립박수와 환호성 속에 우리의 앙코르곡은 ‘고향의 봄’이었다. 사실 해외 나와 살면서 가장 와닿는 노래를 꼽으라면 ‘나의 살던 고향은’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부를 때마다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살짝 시큰해지곤 하는 그 노래를 천명 남짓의 관객과 함께 어우러져 큰 소리 합창으로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


20여 년이 훌쩍 지나고,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안익태의 친일 반민족행위, 이원수 홍난파의 친일 행적들을 접할 수 있어 그다지 큰 존경심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때 한마음 한뜻이 되어 노래했던 기억, 내 조국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뜨겁게 부르짖은 그날의 울림, 그 공간에서의 경험은 특별히 오랫동안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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