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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멜로디, 아이유의 <개여울>

by 고요한밤

1. 작년 7월 중순이었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한국행을 결정하고

비행기에 올라타면서,

나도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무언가 강력한 기운에 이끌리듯 몸을 맡겼었다.

7월 16일 화요일 오후 예정대로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시어머님 계신 실버타운에 짐을 풀고,

근처 홈플러스에서 두 동생들을 만나 저녁을 먹으며

그간의 상황을 듣고 나서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다음날 병원행을 위해 일찍 자야겠다 하던 차였다.

도착 1일 차가 그렇게 그럭저럭 잘 마감되나 싶었다.


당시 의료파업으로 인해 병원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은평성모병원은 입원환자동 엘리베이터 앞에서

출입 단속을 엄격히 하던 때였고,

상주보호자 1인을 제외하고는

어떤 병실 면회도 허가되지 않았다.

모친은 열흘 넘게 이어진

입원과 간병으로 인해 불안을 호소했고,

환자의 의지가 워낙 강하여

다른 간병인을 대체로 쓸 수 없는 상황이라

더더욱 답답해하셨다.

다른 형제들도 직장 생활을 하는지라

인원 교체도 할 수 없어

그간의 상황을 짤막하게 전해 듣는 게 전부라,

이번엔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내가

서울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마치 강렬한 이끌림 같기만 했다.


2. 저녁시간 8시 반 경 남동생의 다급한 연락이 왔다.

갑작스러운 의식 불명으로

가족들 모두 병원으로 오라 했다 한다.

그다음 날인 수요일 아침이 되면

병원으로 가서 뵈어야지 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인지

아득한 머리를 부여잡고 비 오는 거리에 나와

다급히 택시를 부르고 바로 병원에 달려갔다.

내가 거리상으로는 형제들 중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었기에

밤 9시경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작년 2월 이후 근 5개월 만에 마주한 부친은

입 벌린 채로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계셨다.

전이암 4기였으나 일상 대화와 동작이 모두 가능했다가

한순간에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로

충격받고 놀라신 모친과 줄줄이 도착하는 형제들,

부친의 형제들이 모이는 가운데,

병원 신부님이 오셔서 임종성사를 하시게 되었다.

홍콩서 새벽 비행기로 남편도 날아오고,

미국서 연락받은 아들이 출발을 알려오는 중에

의식불명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3. 긴긴밤을 지새우며

그 옆을 내내 뜬눈으로 지키며

모든 가족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가운데,

생전 연명치료 중단 의사결정을 하셨기에

병원에서도 수액 정도만 처방하고

승압제나 기타 조치를 하지는 않았다.

몇 번의 고비를 거듭한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오후 1시경 주치의가

그렇게 바로 돌아가실 상황이 아니고

며칠 더 이어질 수 있다고 해서,

가족들은 소수의 인원만 남고 다시 귀가하였다.

하지만 가족실로 허락된 공간에 연결된 기계에는

자꾸 내려가는 혈압 수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기에,

내가 수시로 혈압 버튼을 눌러 체크해보고 있었다.

이 역시 뭔가 불안한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후 3시 반 경 아들이 인천에 도착하여

총알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와서,

남동생이 아래층 경비 쪽으로 데리러 간 사이,

갑작스럽게 산소포화도가 60대까지 떨어져 갔다.

바로 간호사를 찾으니 간호사가 놀라며

황급히 병실로 달려왔다.

갑자기 급박해진 상황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남동생과 아들을 데리고

바로 병실로 뛰었다.

혈압은 30대까지 내려간 중에,

아들이 “할아버지. 저 왔어요!! “

큰 소리로 부르며 다리를 만져드리는 중에,

18시간을 버티고 버티다가

마침내 그 영혼이 떠나가는 순간을 맞게 되었다.

안색에 핏기가 사라져 가며

사지가 축 늘어지고 마지막 호흡이 멎고

삐~ 기계음만 계속될 뿐.

해외에 나와 살면서 언젠가 오겠구나 했던 순간들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첫 외손주로 각별히 사랑하신 손자까지

멀리서 도착함을 느끼시고

이제는 가야 할 때라고 느끼셨던 걸까.


4. 2024년 7월 17일 오후 3시 55분,

나의 부친은 그렇게 떠나셨다.

며칠 갈거라 말했던 의사가 와서 사망선고를 내리고,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병원으로 모여오고,

상주가 된 남동생은 입관과 장례절차를 두고

즉각적인 여러 선택을 해야 했으며,

생전 독실한 천주교 교인이셨던 본인의 뜻을 받들어

은평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모시기로 했다.

용인 천주교 묘역에 성직자 가족들을 모시는 장소로

가장 알맞은 납골 공간을 확보하였고,

시아버님 때 함께해 주신

상조회사와 장례지도사님을 다시 모시고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어린 조카들을 챙기며 조문 일정을 함께 했다.


7월 20일 토요일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화장과 안치 등 모든 절차를 마쳤다.

아들이 올려드리는 트럼펫 음률이

묘역에 처량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의 부친은 파란만장한 삶과 인연들에

이별을 고하고 영면에 드셨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정신줄을 잡아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다그쳤던 탓일까.

그 며칠 동안 슬픔을 슬픔이라 느낄 마음의 여유도 없이,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도 못한 채로,

내게 닥친 상황에

최대한의 공식적 예를 갖춘다는

마음으로 버텼던 덕분일까.

화요일 서울 도착하고 수요일 소천,

목금 장례식장 토요일 발인과 화장, 봉안으로 마치는

짧고도 긴 일정이었다.


5. 병실을 지키며 계속 서있으면서

귓가에 어느 노래가 계속 울려 퍼졌다.

아이유가 부른 <개여울>,

그 처연한 음성과 피아노 선율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면서

먹먹했던 내 심정을 대신

목놓아 외쳐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생전에 풀지 못한 감정들, 이야기들은 그대로 쌓여있는데,

타이밍을 미루고 미루기만 했던

냉랭한 딸의 머릿속을 망치로 둥둥 두들기듯이,

소월의 시구는 구슬픈 피아노 멜로디와

아이유 음성으로 발화하여

귓가에 증폭되어 울려 퍼졌다.

부친이 미처 못다한 말들과

떠나가는 그 마음이 그렇게 내게로 전해졌는가 보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https://youtu.be/kj71jzO5U8k?si=lusNiZfq0n-AuL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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