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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Sep 23. 2018

<살아남은 아이>-정의는 정의로운가

영화로 철학하기

감독 : 신동석

주연 : 최무성, 김여진, 성유빈



*스포있음



1. 진실


   은찬이 목숨을 던져 살아남은 아이 기현. 성철과 미숙은 아들 은찬이의 이타심으로 살아있는 아이, 기현의 존재가 불편하다. 그러나 돌봐줄 어른이 없고, 스스로 월세와 생활비를 해결해야 하는 기현의 상황을 알게 된 성철은 기현에게 용돈도 건네고, 일하다 잃어버린 오토바이 값도 대신 변상해주고, 자신의 일터에서 도배와 장판 일을 가르치며 기현이자립하도록 돕는다.

   기현과의 스킨십으로 기현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서, 아들이 기현을 구하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지, 기현에게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잘못이 없다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인다.성철의 관심이 불편하던 기현도 성철의 진심에 차츰 마음을 열고 다가간다. 미숙도 자신의 아들 대신 살아있는 기현을 점차 아들처럼 대하며 상실의 아픔을 치유해 간다. 기현도 은찬 부모님의 따뜻함이 좋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삶을 회복해간다.


   기현은 이 불완전한 행복의 진실을 알고 있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던 시간 속에서 행복감이 커질수록, 기현에게는 가책에 따른 고통의 중압감도 커져만 간다.

기현은 은찬의 부모에게 진실을 고백하고 용서받고 더 사랑받고 싶었다. 그리고, 은찬의 엄마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고백한다.

   사실 기현이, 은찬에 의해 구해져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찬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였다는 것을.

기현의 고백으로 은찬의 죽음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타인을 구한 명예로운 죽음에서, 힘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간 피해자로 단숨에 지위가 역전된다.




2. 정의는 정의로운가.


   진실을 알게 된 성철과 미숙은, 기현을 포함해 가해자 그룹을 고소했지만, 기현 한 사람만의 진술 번복으로 상황이 뒤집힐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가해자 부모들은 은찬 부모에게 끝난 일을 왜 다시 들춰내냐는 엄청난 질타를 쏟아부었고, 은찬 부모에게 접근금지 처분까지 내린다.


   은찬 부모는 '의사자'로 지정된 은찬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을 전액 학교에 기부했고, 학교 측은 그 돈으로 장학재단을 설립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은찬이 '의사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되면서 재단 설립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고 학교의 명예가 실추되자, 피해자보다는 의사자로 남아있는 게 낫지 않느냐는 폭력적인 언어로 은찬 부모를 회유하려 든다.

그 와중에 기현과 은찬 부모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주장의 신빙성을 의심받으며 기소권마저 소멸된다.


"그만하자 이제.."

"뭘 그만둬! 한 게 있어야 그만두지....... 흑흑"

"다 그만두고 은찬이한테 갈까?"


자식 잃은 슬픔이 엎친 상황에,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일까지 덮친 은찬 부모의 삶 앞에 놓인 것은, 진실을 에워싸고 있는 거짓된 다수의 횡포였고, 그 앞에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모두가 양심과 도덕에 따라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다 정의롭지는 않다.

모두가 진실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다 진실을 원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두려움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배타적이 된다. 내 자식이 살인사건의 가해자라면 진실을 바로 잡아 법의 심판을 받도록 조치하는 것이 아니라 부성애 혹은 모성애로 둔갑한 거짓된 정의의 모습으로 진실을 가린다. 그것이 우리 인간사회에 만연한 정의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발현되는 순간, 도덕의 가치는 쉽게 빛을 잃고 정의의 이름은 쉽게 퇴색된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법이다. 인간 사회는 분쟁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법을 통해 올바른 정의가 집행되고 양쪽의 승복이 이루어졌을 때 사회가 통합될 수 있다. 그러나, 법이라는 이름의 정의는 소수의 약자를 보호하는 경우보다 다수의 강자 편일 때가 많아보인다.


"정의는 사회의 접착제이다"-토마스모어




3. 속죄와 세례 그리고 새 삶


  성철과 미숙은 기현을 데리고 소풍을 간다. 은찬이 고통스럽게 죽어간 강가로. 거기서 성철은 기현의 목을 조른다. 아들을 잃은 성철에게 이제 남아 있는 선택권은 가해자인 기현을 직접 응징하는 길 뿐이었다. 그러나 차마 죽이지는 못한다.

   더 사랑받고 싶어 은찬 부모에게 솔직했던 기현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성철을 보고 원하던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앞으로도 받을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 즉시, 은찬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강가로 달려가, 그곳에 있는 무거운 돌들을 자기 옷 속에 가득 밀어 넣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미숙이 기현을 발견하고 강으로 뛰어들어 그를 구하려 하지만 역부족이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철이 강에 뛰어들어 미숙과 기현을 강 밖으로 구해낸다. 물에 흠뻑 적셔진 온몸을 강가에 뉘인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본다. 마치 물로 세례를 받고 거듭나는 것 같은 모양으로, 강물에 자신들의 죄와, 상처와, 오해와, 아픔과, 슬픔을 다 씻어낸 듯 보이는 미장센이다.


   그때, 기현의 옷 안에 넣었던 무거운 돌덩이들이 투드득, 옷 밖으로 떨어져 내린다.

마치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듯.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새 삶을 마침내 받아들일 것이다.

결국은 살아남은 것이 옳았음을 자신들의 온 삶으로 증명해 낼 것이다.






덧,

기현은 진실을 밝힌 후, 은찬의 죽음을 의로운 죽음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이 모두 자신의 주도였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오히려 힘없이 맞거나, 위협을 받고 있는 기현의 모습이 영화상에서 여러번 나오는데, 기현이 범인이 아닐 수도, 혹은 기현의 주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명쾌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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