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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Jan 13. 2019

위로라는 이름의 폭력

1-3


 마음이 가시밭이라 위로에도 상처를 받았다. “네 책임 아니야, 죄책감 갖지 마. 혹시라도 나쁜 생각 하는 거 아니지?”라는 말이 죄책감을 더 부추겼다.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1년을 계획한 한국행에서 남편이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곳에서 취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출장을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서른이라는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살아서 숨을 쉬는 것도 미안했고, 배가 고픈 것도 미안했고, 졸린 것도 미안했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미안했다. 그러다 감정이 잦아들고 조금이라도 울지 않는 순간에는 내가 남편을 사랑한 게 맞는지 의심이 들어 괴로웠다. 울고 아파야만 그를 사랑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 스스로를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하지만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세상 속에서 언제까지나 아픔만 내어 보일 수는 없었다. 점차 누구에게도 내 상태를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간 속에서 부유했다.


 내가 남편에 대한 말을 하지 않으니 괜찮아졌나 싶었는지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남자 데려오라는 말을 하셨다. 친구들과 친한 교수님 한 분은 아예 남자 리스트를 뽑아 내밀었다. 내 슬픔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 부모님과 차츰 연락도 잘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교수님에겐 혼자 서운해했다. 이제 그만 다른 사랑으로 잊고 편해지라는 아버지와 지인들의 말이 지극히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 말이 너무 싫었다. 정절을 지키는 착한 조선시대 미망인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랑으로 잊힐 아픔이 아닌 것이다. 


 자식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들 했다. 온전한 새 삶을 시작하기에 용이하다는 의미로 나에게 건넨 위로였을 것이다. 새 삶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이전까지 있었던 일을 편집하듯 도려내고 다른 남자 만나서 사는 게 새 삶인가. 꼭 다른 사람을 만나야만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건가. 그럼 혼자 사는 여자는 온전한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인가. 

 혼자된 여자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기에 또 다른 고통의 의미로 자식이 없어 다행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일이 고통이라는 논리라면 자식을 잃은 사람은 그 고통에서 해방된 것이니 기뻐해야 되는 것인가. 이것에 동의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내게 자식이 없다는 사실은 남편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의미했다. 또 다른 상실감이었다. 한편으론 자식이 있었으면 시댁에서 내게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당연히 이 생각은 자녀를 키우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의 치기 어린 마음일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다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흔히 교통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일 안 나서 다행이라는 위로를 건네곤 한다. 미안하지만 그 말은 위로가 아니다. 교통사고가 난 당사자에게는 팔과 다리가 부러진 지금이 바로 큰일이다. 더 큰 불행이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위로로 건네야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위로가 폭력이 되는 순간이다.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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