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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Jan 13. 2019

타인의 풍경, 타인의 삶

1-4


 어느 날 우연히 거울을 보게 되었다. 이게 나야? 흙빛이 되어버린 얼굴.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부은 눈 안으로는 핏발이 서렸다. 뼈와 조우하기 직전인 살 밖으로 내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 분노를 배출이라도 하듯 열이 가득한 두드러기들이 올라왔다.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그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때는 정도가 더 심했다. 내 외모에 첫눈에 반했다던 그가 이 몰골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자기가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걸 더 속상해하던 그였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계속 울기만 한다면 가슴 아파할 것 같았다. 일단 이 몰골부터 탈피하자. 움직이자.


 시간이 지나 작은 피아노 학원을 하나 인수했다. 주말도 없이 하루 종일 바쁘게 일했다. 미친 듯이 학원 일에 매달리니 의지와 상관없이 학원은 나날이 잘되었다. 덕분에 쉬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그렇게 뭐라도 해야 했다. 학원 일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결혼했다’고 말했다. 사별했다고 말하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것 같았고 이 긴 이야기를 구구절절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잠시 멀리 떨어져 지낸다고도 말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니까. 여러모로 괜찮은 방법이었다. 선을 넘는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남자들을 쳐내야 하는 귀찮음이나 괜찮은 사람 있다며 만나보라는 학부모님들의 과한 친절로부터 나를 지켜주기도 했다. 이후엔 필요하면 내가 기억하는 남편의 생전 모습을 묘사하며 살아있는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실체의 부재를 실재로 둔갑시키며 내 삶의 실제를 지켜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지속될수록 실제 삶과의 괴리는 커져만 갔다. 비정상적인 감정소비를 버티는 것도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왜’도 버거웠다. 삶으로 뛰어든 후로 이전보다 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무렵 한 교수님께 전화를 받았다. 내가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다며 잘 해내고 있다고 따뜻한 응원을 건네셨다. 악으로 버티고 있던 내게 한 줌의 온기였다. 집으로 초대를 하셨고 감사한 마음으로 응했다. 교수님은 동거하시던 남자분과 함께 나를 맞아주셨다. 교수님의 동거남은 독일 교포 2세라고 했다. 칸트의 나라에서 오신 분 답게 모든 것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시는 (약간은 피곤한)분이었다. 독일에서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아 아이들과 부인을 그곳에 남겨두고 한국으로 오셨다고 했다.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지금은 교수님과 동거를 하고 있다고 했다. 동거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신 듯, 결혼이라는 제도를 비판하는 것으로 동거를 선택한 자신의 삶이 얼마나 정당한가에 대한 논리를 계속 펼쳤다. 독일남이 부인과는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라고 했을 때 좀 놀랐지만 교수님이 그 사실을 알고도 선택한 삶이니 내색은 하지 않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결혼 제도의 비판을 넘어 이번에는 모든 결혼생활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어보면 행복한 결혼생활은 하나도 없다며. 내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질문을 쏟아냈다. 내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였다. 억지로 말하는 내 입에서는 남편과 함께 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내 안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의 언어가 터져 나왔다. 한 단어마다 한 문장마다 눈물도 함께 쏟아졌다. 그렇게 힘들게 말한 내 감정에 대한 배려도 없이 독일남은 남편에게 미안했던 일만 쏟아낸 내 말을 확대 해석해 내 결혼생활 전체를 평가 절하했다. 그리고 내 사례를 ‘모든 결혼은 불행하다’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근거 중 하나쯤으로 취급했다. 당연히 남편 잃은 내 슬픔을 공감하지 못했다.

 “난 세월호 사건을 TV에서 볼 때 그 어머니들의 헤어스타일을 유심히 보거든. 그 머리가 단정한 상태이면 그 울음은 가짜야. 슬픈데 어떻게 머리를 만질 정신이 있겠니? 지금 네 머리도 단정해 보이고 예뻐 보이는데.”


 충격이었다. 갑작스럽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말하지 않아도 사람이라면 공감할 일이고, 단순한 해상사고가 아니라 국가가 방관한 구조적 참사이기에 온 국민이 분노하는 세월호 사건을 두고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다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내 슬픔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기에 더 충격이었다. 그때의 나는 외모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움직여야 하니까 움직인 것이었다. 한 번은 내 상황을 알고 있는 지인이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며 맨날 똑같은 옷 입지 말고 돈도 많이 버는데 옷도 좀 사 입으라고 충고를 했다. 알겠다고는 했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어선지 내키지 않았다. 그런 나인데, ‘모습이 단정한 슬픔은 가짜’라는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제야 알았다. 내 모든 행동이 평가의 대상이었다. 미망인에게 맞는 행동인지 아닌지. 미망인에게 맞는 겉모습인지 아닌지.


 내면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자신도 정리하지 못하던 시기였기에 당시  삶과 감정을 독일남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다만  순간 분명했던 것은 자신의 실패한 결혼생활과 자신에게 고민 상담을 해오던   커플만의 예를 가지고 모든 결혼생활을 불행하다고 확대 해석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점이었다. 자기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든 결혼생활을 불행하다고 일반화하고 계신 거라고 반박했다. 결혼생활이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던  사람이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인데 의견이 항상 일치하고 위기가 없다는 것이  이상한  아닌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위기를 대화로 풀어가면서 신뢰가 쌓이고  돈독해지는  부부관계 아닌가? 거기다 지금 이렇게 교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결혼제도 안에 들어와 있지만 않을 뿐이지 결혼 생활과 무엇이 다른가? 그럼 지금  분의 삶도 행복하지 않은가?  무슨 기적의 자가당착 논리인가.  역시 결혼제도에는 회의감이 많은 사람이기에 제도에 대한 비판은 동의하지만, 그것을 넘어 결혼생활까지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말했다. 이전부터 동거가 많은 삶의 형태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분의 삶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스스로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을 버리시고 지금처럼 예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혼생활은 행복했다고 말했다.  집을 나오며  가지를 다짐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의 삶을 깎아내리지 말자. 누구나 선 자리가 다르면 풍경도 다른 법이니까.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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