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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Jan 13. 2019

낯선 삶으로의 첫걸음

1-8


 삶은 언제나 낯선 모습으로 와서 ‘너는 여전히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려주는 듯하다. 


 남편과 사별하고 2년 정도가 지난 즈음에 정말 좋아하는 후배가 결혼을 한다기에 흔쾌히 참석했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을 사랑하며 살겠습니까?” 

 평소에 열심히 듣지도 않는 식상한 레퍼토리의 주례사가 원래 그렇게 슬픈 내용이었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에서 꽂힌 건지 ‘평생’에서 꽂힌 건지 눈물이 끊이지 않고 쏟아졌다. 나, 아직 괜찮지 않구나. 

 그 이후로 지인의 결혼식에는 축의금만 보내고 가지 않는다. 아니, 못 가는 게 맞다. 이후로도 친구들이 남편과 알콩달콩 지내는 얘기만 들으면 눈물이 났다. 싸우고 하소연하는 얘기도 부러웠다. 나는... 남편과 싸울 수도 없는데. 그토록 시간이 지났어도 나는 지금도 지인의 결혼식에 못 가고 다른 부부들은 여전히 부럽기만 하다. 

 죽음과 신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하고자 철학책들과 인문학 강연 등을 보며 죽음을 이해하려고 버둥거렸다. 그 어디에도 명쾌한 답은 없었고 모르겠다는 사실만 더 선명해졌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삶을 배웠다는 것. 그렇게 죽음은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죽음은 두려운 대상도 외면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 인간은 단지 노동력으로 치환되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고 그러한 사회 속에서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쓸모를 상실함과 같다. 마치 쓸모를 다한 제품을 폐기 처분하는 것처럼 장례식장이나 화장장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빠르게 그 존재를 지워버린다. 

 롤랑 바르트가 말했다. “애도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정지상태다.” 한 사람의 죽음은, 이제 좀 괜찮아졌나 싶다가도 어느 틈에 찾아와서 선명하게 슬픔의 감정을 되살려 놓는다. 세상의 기준으로 내 슬픔은 유효기간이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내가 이렇게 아픈 것을 보면 분명 애도하는 것은 그 기간이 없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도 틀렸다. 오늘을 살아내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바로 약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사람’이 배제되어 있는 이 말을 믿고 시간에만 의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시간은 아무것도 낫게 하지 못한다.


 살면서 나를 믿어 본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나를 믿어 주고 싶다. 느리지만 차곡차곡 삶을 회복해가고 있다고. 내 시간을 스스로 약으로 만들겠다는 상징적 선언이 필요했다. 몇 년째 검은색이던 머리를 밝게 탈색했다. 마음까지 밝아진 것은 아니다. 내 삶의 치유 과정은 내 언어를 찾기 시작한 지금부터다. 


그리고 이제, 삶의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려 한다.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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