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바꾼다는 건...
2017년 11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3일째 되던 날,
함께 일했던 팀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놀 만큼 놀았지? 이제 메인으로 입봉해야지. 입봉시켜줄테니까 같이 하자.”
방송일을 시작한지 10년.
'메인입봉'은 오래 기다려온 자리였다.
누군가는 인생의 전환점이라 불렀을 전화를 끊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뻐야 맞는데
이상하게 한숨이 먼저 나왔다.
이제는 모든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선언.
섭외가 틀어지면 수습해야 하고
심의에 걸리면 해결하고 한다.
2009년 인도 여행 이후로 거의 쉬지 않았다.
섭외에 쫓기고, 심의에 쫓기고, 데드라인에 쫓기며
늘 다음 방송을 준비하는 삶.
컬러바 따윈 없던 그런 숨가쁜 삶.
입봉은 승진이 아니라
더 센 압박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입봉하면 일이 더 빡세지겠지.’
기쁨 대신 피로가 먼저 밀려왔다.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도 했고 당분간은 좀 쉬고 싶어요” 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고,
패배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출근을 3일 앞둔 어느 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동시에 극심한 입덧이 시작됐다.
물 한 모금도 넘기기 힘든 나날 속
초록색 담즙을 계속해서 토해냈고
응급실에 실려갈 만큼 유난스러운 입덧이었다.
나는 그렇게
메인입봉이라는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일을 그만두었다.
솔직히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안도의 숨이 훨씬 더 컸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멈춘 시간이었다.
하지만 자발적인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입덧이 잠잠해지자
권태가 밀려왔다.
TV를 보며
“자막이 왜 저래.”
“구성이 너무 뻔하잖아.”
혼잣말이 늘어갔다.
휴대폰을 보다가도
“이건 아이템 되겠는데?”
나는 여전히 작가였다.
일을 하지 않아도, 머릿속은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건강 프로그램을 하며 알게 된
한의원 원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인데
코너를 함께 기획하고 대본을 써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100% 재택으로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바로 대답했다.
“콜이죠.”
방송 일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나는 방송판을 떠나 유튜브판으로 이동했다.
환경은 완전히 달랐다.
심의도 없었고
생방도 없었다.
대신 조회수가 모든 것을 증명했다.
그곳은 다른 종류의 무대였다.
페이는 막내작가의 월급 수준이었지만
계속해서 기획하고, 쓰고,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식재료로 아이템이 정해지면
그 식재료의 영양학적 의미를 정리하고
옛 의학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찾아
영양소 파괴를 줄이는 조리법까지 정리해 대본으로 썼다.
한의학적 해석이 더해지면
하나의 콘텐츠가 완성됐다.
익숙한 일이었지만
환경은 완전히 달랐다.
나는 일주일에 다섯 편씩 대본을 썼다.
방송과 달리 내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본쓰는 게 익숙해질 무렵
원장님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내가 한방차를 개발했는데,
그냥 판매하면 힘이 약할 것 같아요.
마케팅을 위한 스토리를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
흥분되는 제안이었다.
이건 단순한 대본이 아닌 제품에 숨을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나는 동의보감과 본초강목, 그리고 한의학 논문까지 뒤졌다.
약재의 어원과 기록을 찾아 읽고,
그것이 소비자에게 어떤 의미로 이어질 수 있는지
한 줄 한 줄 풀어냈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닌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 제품이 되었다.
그리고 한방차는 성공적으로 홍보되었다.
나는 출산 직전까지 대본을 썼고,
출산 후 100일 만에 다시 일을 시작했다.
방송판보다 훨씬 자유롭고
덜 쫓기는 유튜브판에서
엄마가 된 나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알았다.
나는 판을 옮긴 것 뿐이구나.
입봉 타이틀을 내려놓은 대신,
나만의 페이스로 버티는 새로운 생존법을 찾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쓰는 사람이다.
무대는 달라졌지만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커리어는 한 번의 입봉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
상황에 맞게 판을 옮기며 버티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메인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 쓸 수 있는 자리를 선택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판이든 옮겨 다니며
끝까지 쓰는 사람으로 남는 건 어떨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가늘고... 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