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육아어린이집의 별명과 평어 문화
함께크는어린이집에 3월부터 등원 예정임을 이야기하고 난 뒤, 그 전 달인 2월에 어린이집에 대한 신입 구성원들의 사전교육이 이루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들은 내용은 정말 방대한 내용이라 디테일하게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앞으로 시작될 어린이집에 대해 큰 그림이 그려지는 시간이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별명 & 평어 문화
사전교육 때 나눠준 교육 자료에는 당시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던 부모들의 별명과 아이 이름, 나이와 성별 정보가 표로 쭈욱 적혀 있었다. 그리곤 우리에게 별명을 정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기존에 다니고 있는 부모들과 별명은 겹치지 않아야 한다.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 별명을 짓는 그룹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부모와 교사였다. 이렇게 별명을 지어 부르는 것은 어린이집 구성원들끼리 친근감을 갖고 평등하게 잘 지내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여기에서 구성원이라 함은 아이, 부모, 교사 모두를 이야기한다.
- 아이와 다른 부모 사이
보통의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아닌 다른 부모, 특히 '다른 아빠'에게 말을 걸기가 쉽지 않다. 그 아이들이 다른 부모들을 그들의 개별 별명으로 부르게 된다면, 호칭이 애매한 부모를 부르는데 좀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키가 작은 친구가 키가 큰 친구에게 말을 걸듯, 단지 '부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상 대화를 편하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엄마 아빠 입장에서 그 많은 어린이집 아이들이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보다, 무턱대고 '이모'라고 부르는 것보다 '내가 지은 별명'으로 불러주는 게 듣는 입장에서는 더 기쁠 것 같다. 무엇보다 그 별명은 부모 자신이 정하기 때문에 당연히 듣기 좋은 호칭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아이들이 나를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아마'나 '친구'로 여겨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 아마 : 공동육아 활동 초기부터 사용된 '아빠/엄마'의 줄임말. 최근 유행하고 있는 '엄빠(엄마/아빠)'와 같은 뜻이다. '엄빠'라는 말이 재미있게 들리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빠가 먼저 쓰인 '아마'라는 말이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 아이와 교사 사이
아이들도 교사를 권위를 가진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교사의 ‘별명’을 부른다. 이 역시 편안하고 친근한 호칭을 통해 아이들이 교사에게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는 아이들을 먼저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 부모들 사이, 부모와 교사 사이
부모들 사이, 부모와 교사 사이도 마찬가지다. 부모 참여가 있는 공동육아어린이집의 특성상 부모들끼리 함께 할 일이 많은데 이때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당)하거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기 위함이다. 부모와 교사가 함께하는 회의에서 의견을 개진할 때도 이들 사이는 모두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평등하다.
별명을 부를 때 유의사항이 있다면, 별명 뒤에 ‘님’이나 ‘씨’를 붙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내가 전에 일했던 회사들은 그 당시에 앞선 문화를 가진 곳들로, 신입사원부터 사장님까지 모두를 모두가 직급 대신 '00님'으로 불렀다. 심지어 온라인 동호회에서도 별명 뒤에 '님'을 붙이지 않는가.
그런 문화에 악숙해져서인지 난 '님/씨'를 별명 뒤에 붙이지 않는다는 게 많이 어색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부모의 별명을 ‘님’ 자 없이 부르다니 처음엔 말도 안 돼! 싶었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느새 금방 또 적응이 되어 나이가 적건 많건, 부모들끼리 '별명으로만' 잘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별명을 쓰는 취지를 잘 살리기 위해 아이들은 부모나 교사에게 모두 ‘평어’를 쓴다. 호칭뿐 아니라 대화도 평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화 내용도 자연스럽게 권위나 외적 압도감이 줄어든다. 아이를 위한 배려다.
다만 부모들 사이, 부모와 교사 사이에서는, 즉 어른들끼리는 서로 ‘존댓말’을 쓴다. 이는 기껏해야 4살 안팎으로 나이 차이가 나는 아이들과 달리, 부모들끼리는 나이 차이가 20년이 나는 경우도 있어서 아직 유교문화에 기반해 30년 이상 살아온 어른들을 위한 배려라는 생각이다. 또한 회의 자리에서 서로 반말로 의사소통을 할 경우, 원래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 '반말'로 감정이 상하는 경우가 생길 것을 우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어른들끼리 존댓말을 쓰는 것도 아이들과 평어를 쓰듯 각자 상황에 맞게 배려한 것 같다.
별명 문화의 단점??!!
그렇지만 별명 문화의 단점이 분명 있긴 하다.
예를 들면, 어린이집 외부 사람이 어린이집 구성원의 실명을 물었을 때 까마득히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곤 "그 사람 이름은 말이지... 0000(별명)이야."라고 하면 엉뚱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웃기다.(ㅎㅎ)
또 장례식장에 가서 조의금을 낼 때 조의를 표하러 온 사람을 위해 나의 별명으로 적을까, 아니면 조의금을 정리하는 사람이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본명으로 쓸까 고민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부모들끼리 어디론가 놀러 갔을 때 조금은 민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 같이 공연을 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 우리끼리 : “팅커벨, 티켓 찾았어요?”, "강아지똥, 영화 보기 전 커피 한 잔 할까요?"
* 지나가던 사람 : ‘팅커벨? 팅커벨?’(어디 있다는 거지? 두리번두리번), '강아지똥?? 똥??'
아마 주변에선 우리가 무슨 코스프레 같은 동호회 사람이 아닐까 생각할 것이다.(물론 전혀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밖으로 나가선 우리 서로 '이름'을 부릅시다!' 다짐도 하지만 또다시 '별명'을 부르며 하하호호 웃는 우리.
한 외부인이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별명 문화에 대해 듣더니 그러더란다.
“부모 별명 중에 ‘꽃사슴’, ‘선녀’, ‘팅커벨’이 있다고? 야, 아무리 자기가 정할 수 있는 별명이라지만 양심이 좀 없는 거 아니야?”
물론 처음 들으면 별명이 좀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별명을 지은 사람이 대담하게도, 용감하게도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보통 별명은 남이 지어주고, 또 그 별명으로 불리는 당사자들은 그 별명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 생활하는 몇 년 동안, 그리고 그 커뮤니티가 유지되는 한 자신이 불릴 별명을 자신이 정하고 그 별명으로 계속 불린다면, 그럴 때마다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00엄마, 00아빠가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별명으로 불림으로 인해 공동체 속에서 온전한 나로 존재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별명도 계속 부르다 보면 그 사람의 이름처럼 느껴져서 처음에 오글오글 하는 느낌도 거의 사라지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외부의 우려 섞인 시선??!!
한편, 더 나아가 이러한 공동육아어린이집의 별명과 평어 문화에 대해 반감이 있으신 분들도 있다.
"어떤 두 아이가 어른인 저에게 말을 거는데, 한 아이는 존댓말을 하고 다른 아이는 반말을 하더라고요. 저는 당연히 존댓말을 하는 아이가 더 예뻐 보이더라고요. 선생님도, 아이에게 항상 존댓말을 하도록 가르치면 어때요?"
"한국말의 존댓말을 못 배운 외국 교포애가 한국어를 하는 것 같아요. 좀 걱정되어요."
그때 나는 우리가 별명과 평어를 쓰는 이유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드렸고, 그러니 이렇게 말씀해주신다.
"아, 그런 뜻이 있었군요.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 평어 문화를 왜 갖고 있는지 설명을 잘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그런 좋은 취지를 들으니 이제 조금 이해가 되었어요."
참고로, SBS 영재발굴단에 출연해 유명해진 어린이 전이수 그림책 작가의 어머니 김나윤 작가의 책 <내가 너라도 그랬을 거야>에 보면 이에 대한 답변이 나온다. 김나윤 엄마 역시 이에 대해 고민이 많아 공동육아어린이집에 보내기 전에 어려서부터 알았던 대안학교 교사인 이웃집 오빠에게 '평어 문화'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반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게 아니라, 존댓말을 존중심을 가지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세뇌시키지 않고, 기다려주는 거야. 그리고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관계에서 시작하면 아이들은 감정표현을 꺼리지 않고, 서슴없이 얘기해서 나눌 수 있게 돼."
- p53-54, 책 <내가 너라도 그랬을 거야>에서 발췌.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문화를 이해 못하는 어른들과 문화 속에서, 매번 이렇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짧게 '저희 아이 어린이집에서는 교사와 아이 사이에 평어로 친구처럼 대화하는 문화가 있어요."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르신들이 이러한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약간의 절충안처럼 지나가는 동네 주민들이나 경비아저씨, 청소 아주머니 등에게는 그래도 혹시나 오해하실까 싶어 내가 먼저 그분들에게 "안녕하세요?" 이렇게 크게 인사를 한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전에는 '안녕하세요?' 하던 첫째는 공동육아어린이집을 다니며 동네 주민들이나 경비아저씨, 청소 아주머니 등에게 다시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다. 하지만 부모가 이렇게 매번 동네 어르신들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고 아이도 6살로 조금 성숙해져서인지 이제는 첫째, 둘째 모두 동네 어르신들께 모두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또 어르신들이 조금 불편해하는 눈치를 보이면 먼저 아이들과 친구처럼 평어 대화를 한다. 부모와 아이가 평어로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은유적으로 우리 가정이 현재 따르고 있는 교육 방식에 대해 표현해주기 때문에 처음엔 약간 의아하거나 불편해하시는 눈치여도, 대놓고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이렇게 평어 문화에 젖어 있던, 걱정스러워 보이는 아이들도, 어느새 8세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또 금방 존댓말 문화에 적응을 한다는 것이 공동육아어린이집 졸업 선배 부모들의 조언이다.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보자!
그리고 나는 때로 딸과 자기 전에 어린이집 생활이나 아이의 고민은 없는지 물어보곤 하는데, 가끔은 말하기 싫어하기도 하지만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듯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가 있다. 나는 영원히 딸아이와 친구처럼 편히 대화할 수 있는 관계이고 싶다. 아이가 사춘기를 지날 때도 조그만 창을 열어두고 기다려주며 친구처럼 편하게 대화를 하고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것이 부모의 선택인 것 같다. 조금 더 어리고 예민할 때 이런 문화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데 자유롭게 해 줄 것이냐, 타협점을 찾을 것이냐, 아니면 말 것이냐의 선택지 중에서 말이다. 물론 존댓말을 한다고 표현을 자유롭게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도 존댓말로 나에게 말을 거는 아이가 솔직하게 순간적으로 더 예쁘다. 하지만 아이의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고민상담사가 되고 싶은 나는 평어 문화가 아이들의 표현 영역을 조금 더 확장시켜줄 수 있는 가능성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이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라도 아이가 엄마인 나에게 말을 할 때는 평어로 편하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