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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가난의 하찮은 비참함에 대하여

by 금파

139만 6천 원.

지난 1년 동안의 내 평균 월 수입이다. 누군가에겐 많은 돈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24년과 25년도의 대한민국에선 최저임금도 되지 못하는 돈이다.


나는 1년 동안 매월 이 돈으로 전세금의 대출이자를 갚고 휴대폰 요금과 각종 공과금, 관리비, 보험금 등을 납부하고 하루 두 끼의 식사를 먹으며 네 곳의 기부처에 소액이나마 기부를 해왔다.


몇 년 전, 처음 프리랜서로 전업하고 한 달 만에 손에 쥔 돈은 1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나마 성장한 것을 스스로 기특하게 여기기에는 지난 몇 년의 삶이 참으로 힘겨웠다.

식사는 거의 대부분 집에서 해 먹었고 한 달에 한 두어 번 정도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처럼 배달음식이나 외식을 하곤 했다. 업무 때문에 밖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할 때도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에 무료 제공되는 국물로 배를 채웠다. 그럼에도 월급쟁이시절부터 원두커피를 내려마시던 습관만은 버리질 못해, 한 달에 한번 정도 원두를 사서 매일 커피를 내려마셨다.


사치하는 씀씀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가난하게 살아보니 내가 사려하는 모든 것이 사치로 느껴진다.


한 봉지에 6천 원 하는 원두와 8천 원 하는 원두 중에서 약간의 고민을 하다 전자를 고르게 된다. 한쪽에서 크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1만 원이 넘는 원두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사치품이 되었다. 계절마다 싼 과일 몇천 원어치씩 사놓고 야금야금 꺼내먹으며 1주일을 보내던 것도 이젠 사치의 범주에 올라버렸다. 과일값 몇천 원이 이렇게 비싸게 느껴질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일할 때 갖춰야 하는 복장들을 자비로 구매해야 하는데, 프리랜서 전업 첫 해에 사두고 매일 빨래를 해가며 입고 있다. 세일 소식에 홈페이지에 방문해도, 그 세일가를 보고 다시 창을 닫는 일이 수도 없었다.


식사에 큰 애착은 없지만 기본반찬인 김치와 쌀, 현미 같은 곡물과 참치와 스팸 같은 명절선물들을 본가에서 지원받아 그나마 식비를 아낄 수 있었다. 환갑을 훌쩍 넘긴 부모에게 해드려야 할 자식 된 도리와 어린아이 같이 어리광을 피우고 싶은 마음 중 어느 것이 더 컸을진 모르겠지만, 몇 달에 한 번 지방에 있는 본가에 내려가는 것도 중요했다. 안부를 여쭙고 용돈도 드리기 위해 얼마 안 되는 급여를 쪼개고 쪼개 모으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들에게 줄 선물을 사면서, 멀리 살아 가끔씩만 볼 수 있는 애인과의 간헐적 만남을 위해서, 모일 틈도 없이 손 안의 모래처럼 쑥쑥 빠져나갔다.


아끼고 아껴 살아도 돈은 모이지 않고 삶은 비참과 존엄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내가 느끼는 비참함은 참으로 하찮은 것들이었다. 입고 싶었던 스타일의 옷을 장바구니에만 넣어둔 채로 그걸 살 3만 원의 여유가 생기기를 바랐던 시간이나, 먼저 결혼해서 큰 집에서 대기업에 다니며 안정된 동생 가족과의 식사에서 10만 원이 넘는 밥값을 낼 엄두조차 하지 못하고 '잘 먹었어, 고마워' 하고 인사하는 게 고작이었던 순간 같은 것들. 치과 진료라도 받기 위해 모으고 모았던 돈을, 제대로 먹지 못해 아파 누운채 병원비로 쓸 수밖에 없던 날과 여윳돈이 생기면 꼭 가봐야지 생각만 하며 그 앞을 느리게 지나갔던 집 근처의 맛집이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는 걸 지켜보던 날 같은 것들.


며칠 안 되는 휴가동안 알바라도 구해보려고 동동거리다 결국 단기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그 휴가를 즐기지도 못했던 여름날들이, 나를 비참의 웅덩이로 자꾸만 밀어 넣었다. 모임날마다 겨울에 오수한 벌, 여름에 못한 벌로 버티고 있다는 걸, 동아리 사람들이 눈치채고 나만 특별회비에서 제하여 준 것을 알았을 때 그 비참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것 같았다. 3년을 매일같이 매었던 에코백이 낡고 닳아 손잡이에서 실오라기들끼리 엉기어 있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켰을 때, 그럼에도 맬 가방이 없어서가 아니고 그것을 애정하기 때문이라고 둘러대야 했을 때, 나는 비참의 웅덩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럼에도 그 웅덩이는 깊지 않았다. 난 여전히 네 군데의 크고 작은 단체에 기부를 하는 사람이었고, 주말마다 성당에 가 주변인의 안위를 기도하는 신앙인이었으며, 웃으며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들이 않는 취미-(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독서와, 그림, (몇 년 전 사둔 재료로) 자수-를 즐기며 작은 성취감을 끊임없이 쟁취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크고 멋진 선물대신 직접 그리고 엮어 만든 동화책을 조카에게 선물했고, 그가 좋아하는 내용으로 웹툰을 만들어 애인에게 선물했고, 일곱 살 아이가 된 것처럼 부모님에게 애교를 부려 웃게 만들어드렸다. 일하며 만난 사람들에게 진심과 애정을 담아 애정과 조언을 주었고,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고 있는 친구들에게도 빈손으로나마 안부를 전했다.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그것이 나에게 강요하는 것들이 슬펐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 나의 존엄은 수시로 흔들리고 휘청였지만 그럼에도 꺾이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나의 가난은 사소했고, 나의 비참함은 하찮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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