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 다시 읽기
그가 말하는 '이해'는 관용이나 공감, 포용의 뉘앙스를 띈 보편적 단어와 조금 결이 달랐다. 그는 '너를 이해한다.'라는 말을 무기처럼 사용하고는 했다. 이해하겠다 선포한 이후로 더는 그 주제에 관하여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주장하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의 이해는 곧 더는 사유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이었고, 상대를 답정너로 몰아가는 일종의 폭력이었다. '자, 니가 듣고싶었던 말이지? 이해한다는 말.'. 오만했다.
그 덕에 쭈욱 나는, 어떤 것을 '이해 했다.'고 말하는 것을 스스로 경계했다. 알 것도 같다, 네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은 느껴진다, 공감한다, 하지만 내가 감히 너를 어떻게 완전히 이해하겠느냐. 나는 네가 아닌데. 내가 너가 되어보지 않는 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너의 그것을 완벽히 너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다. 나의 이해는 결국 너를 등에 업은 내 방식으로의 이해이다. 너를 이해한다는 말로 너에 대해 사유함을 멈춰도 된다는 자가면제부를 부여하고싶지 않다.
이해라는건 너무 거만하다.
라는 내 너저분하고 긴 생각을, 하루키는 소설 속에서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이해는 항상 오해의 전부에 지나지 않는다."
역시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다르구나.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글은 작가에게...!
완벽한 궤도를 돌지만, 저 너머의 스푸트니크와 겹쳐질 그 찰나까지의 고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