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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민 Nov 19. 2021

하드보일드한 원더랜드, 그 뻔뻔한 아이러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무라카미 하루키 저


  나는 하루키 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카테고리화 하고 싶다. 가장 한국인에게 주목받은 그의 두 소설을 상징적으로 차용하자면 이러하다. 주로 ‘상실’이라는 키워드를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담백한 소재와 문체로 풀어나가는 ‘노르웨이의 숲’식 소설이냐, ‘교차서술’ 기법을 필두로 하여 현실과 비현실의 기묘한 조합을 내세운 ‘1Q84’식 소설이냐.

  초기의 ‘1973년의 핀볼’이나 ‘양을 쫓는 모험’은 그 두 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섞여있다. 상실과 허무가 소설 전반에 깔려있고,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모호하다. 덕분이 읽는 이로 하여금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실험적인 시도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준다. 이후 이어지는 정말이지 다양한 단편들은 앞선 소설들을 마치 작은 조각들로 분해하여, 흡사 어느 장편 소설을 요리하기 위한 재료를 나열해놓은 듯하다. 작가로서의 역량이 최고조에 달한 시절에 하루키를 만나, 그의 초창기로 시간여행중인 우리 세대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의 의미있는 습작이며 과정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첫 장편소설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그의 의도치 않았던 노선이 확실해진다. 다시 브릿지처럼 이어지는 몇 단편들을 거쳐서 나온 다음 장편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점에서 내 주장에 설득력이 더해지지 않는가?

  흔히 판타지로 분류되는 소설들은 작가가 구축한 독특한 세계관이 이야기 저변에 깔려있다. 현실과 구분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이 ‘세계관’이 소설의 장르를 판타지로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다. 그렇다보니 소설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을 배경지식으로 갖고 가는 것이 필수이며, 그 때문에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은 첫 시작을 그들의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넉넉하게 할애한다. 그런 관점에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상당히 불친절한 판타지 소설이다. ‘흰 엘레베이터’를 시작으로 지극히 초현실적인 묘사들이 앞뒤 설명없이 무자비하게 펼쳐진다. 심지어 한 챕터의 호흡이 길지도 않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조금 파악할라 치면 또 다른 ‘세계의 끝’이 교차되어 등장한다. 이는 자칫, 소설 그 자체의 진입 장벽으로써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여지가 다분하다. '참고 견디라'라는 말은 크게 힘이 없다. 즐겁기 위한 독서를 참고 견뎌가며 해야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위해, 나는 계속 하루키를 읽을 예정이다.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하고 나니 내 머릿속에 자꾸 영화 '인셉션'이 오버랩된다. 무의식의 세계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나, 무의식을 둘러싼 권력구조, 정보와 관련한 특정 직업들 등에서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보인다. 이 소설이 훨씬 앞선 시대의 작품임을 감안하면,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와, 정말.

  마지막 결말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 작가는 작품 속 1인칭의 화자를 두 개의 자아로 분리시킨 후, 이분법적인 구조로 교차 서술을 이어간다. 분리된 자아의 '본체'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 명명된 현실을, '무의식'은 '세계의 끝'으로 명명된 가상의 내면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작가는 마치 연관없는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소설을 진행시킨다. 소설의 중반부에 본체가 먼저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함을 인지하게 된다. 허나 다음의 이야기는 우리가 읽어오던 통속적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약 48시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이 남아있음을 본체는 인지한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마주한 현실을 구제하고자 고군분투하여 끝내 고난을 극복하는 주인공의 서사, 우리가 뻔하게 기대하는 흐름이 이 소설에는 없다. 주인공은 남은 시간동안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정리한다. 여기서 독자는 그 기대를 주인공의 또다른 자아에게 걸기 시작할 것이다. 무의식의 자아가 그림자와 손잡고 당당히 현실로 돌아와주리라 예상한다. 하지만 무의식은 의도적으로 그림자를 풀어주며, 그로 인해 희미하게 남을 '마음'을 품고 자신이 구축한 이 완전하여 불안하기만한 '세상의 끝'에 남기로 결정한다. 이는, 세상의 끝이 이렇게 서늘한 이유가 '마음'의 부재에서 온다는 사실을 인지했을때 이미 결정된 일일지도 모른다. 현실에도 없고, 내면에서 마저 온전히 잃을뻔한 '마음'을 선택하여, 필수불가결의 부정감정들을 껴안고서라도 감정의 동물로 살겠노라 결심하는 것이다. 그래, 왜 굳이 현실이어야 하는가? 어쩌면 작가는 제목에서부터 결말을 암시하고 있었다. 현실은 '원더랜드'이지만 '하드보일드'하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냉혹한 동화의 나라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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