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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이문숙 Feb 07. 2022

곰숙

-별명의 연대기

오늘은 자기 이름을 물구나무 세워 보세요. 어떻게 하는 거냐구요.


4교시가 시작되었다. 점심 배식을 앞둔 급식 카의 요란한 바퀴 소리와 함께 복도를 넘나드는 음식 냄새로 아침 거른 뱃가죽들은 더욱 주글거리며 꾸륵댔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기적 없이 4교시의 홍해를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까. 교실 문을 드르륵 열었다. 점심 시간을 앞둔 다른 때는 무력한 고요 속에 빠져, 나는 4교시를 혼자 허우적대야만 했었다.


그러나 예상을 거슬러 아이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소리질렀다. ‘곰숙 샘, 곰숙쌤, 곰쑥쌔앰.’


그 환호를 이해하지 못한 내 눈꼬리는 먼저 발칵 열렸다. 내가 무슨 곰숙이라고. 왜 내가 왜 곰숙이야. 나는 곰처럼  느려터지지도 않고 그토록 이기적인 인간 사람이 피신해서 매달려 있는 상수리나무나 갈참나무 아래서 빙글대지도 않는데 왜 곰이란 말인가. 왜 발 아래는 늘 가시 센 밤송이만 굴러다니고 따끔댄단 말인가. 나보구 미련곰탱이라구. 이것들이 나를 놀려.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곰숙샘, 지난 수업 생각해 보세요. 360도, 물구나무, 물구나무.’


지난 시간에 우리는 르네 마그리트의 신발 끈 꿰어진 맨발과 밤과 낮이 환치된 빛의 제국을 보며 생각을 회전하는 방법에 대해 일명 뇌 쌓기라고 부르던, 브레인스토밍을 하였다. 푼크툼punchtum이란 말을 슬쩍 찔러놓고.


그래, 문숙을 물구나무 세워보자. 그러고 보니 아니, 문은 곰이 아닌가. 곰곰곰곰. 발령 초기 내 첫 별명은 레오 리오니 Leo Lionni의 '잠잠이'였으니. 나는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이 동화를 한 장 한 장 펼쳐 보이며 읽어 주었었다. 거기엔 개양비귀꽃을 들고 생각에 잠긴 생쥐가 주인공이였는데 곰이라니 내가. 하긴 줄곧 나는 '곰곰' 생각한다'의 '곰곰'을 사랑하였으므로. 그렇다면 좋아 받아들이지, 흐흥.


아, 난 곰곰 곰숙, 기꺼이 곰숙이 되어 주었다. 내멋대로 곰곰이 깊이 사유하는 곰.


그때부터 교훈 성실은 실성이 되고 공수라는 배꼽 인사는 공습이 되었다. 암튼, 모든 상상력의 원천은 실성이라는 반역과 전 세대 익숙한 것들에 대한 공습에서 비롯되는 거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내 별명의 이력서를 써야지. 잠잠이, 달샘, 곰숙에 이르는 내 별명의 연감표를 쓰리라.


그러고 보니, 문숙의 '숙'을 물구나무 세우면 '놋'이 된다.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 에서 그 쟁쟁한 놋주발 소리. 아, 놋도 그럴 듯하네.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서


너희들 잠이 확 달아도록 내일은 돌로 된 거대한 사과를 보여줘야지. 너희들 이런 거 봤어. 해변에 떠있는 의자와 금관악기를, 직립한 물고기를. 이렇게 마의 4교시를 건너가야지  .


다음의 그림은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그린 것이다. 국어책에 가득한 낙서와 빨간 손톱 매니큐어와 빨간 하품, 수업 시간이면 어김없이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벽에 걸린 가지 않고 혼자 흐물흐물 녹는 시계. 그리고 단정한 교복을 차려입고 있지만, 메고 있는 악마의 가방. 시험 직전 균열이 가는 벽에   몰래 그려넣는 폭파 단추.


학교는 늘 어떤 식으로든 폭파 중입니다. 펑. 폭발음이 들리면 학교에 오는 유일한 이유인 점심 시간입니다. 책상에 붙여놓은 식단표를 보니,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렸던 빨간 제육볶음이네요. 종치기 전부터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고 오늘은 내가 급식 일등으로 받아야지, 요땅!


그림1. 책은 국어책 세밀화, 빨간 손톱, 빨간 목젖, 빠알간 하품.

그림2. 배꼽 인사 공수, 단정한 공습.

그림3. 시계가 흐물흐물,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영속.

그림4 난 누규?

#르네마그리뜨#팀아이텔#학교#레오리오니#동화프레데릭#써니 김#어둠에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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