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앙세라는 물자전거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by 시인 이문숙

옛날 호수에서 타던 '휘앙세' 같은 이름의 물자전거. 그런 이름의 자전거라면, 휘리릭 그 안장에 익사의 위험을 알면서도 오른다. 올라탄다.


아무도 없는 폐장된 밤의 호수에서 페달을 밟는다. 11시에 자동소등되는 밤의 공원은 찍찍거리며 한 때 ‘시적 생쥐’였던 나를 잉어보다 더 날렵하게 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햇볕 아래 졸고 있는 ‘문학적 도마뱀'이라면 나는 한때 보잘것 없는 ‘시적 생쥐'였고. 시적 생쥐의 송장헤엄 같은 쓴다는 행위.


도대체 이렇게 화창한 날. 말라가위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희고 붉은 꽃들이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날 때, 눈 깜짝않고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빼앗는 산적에게도 발병한다는 거식증과 어지러움증. 이 시기의 괴이한 질병. 당신은 도대체 왜 이런 증상을 제게 주시나요. 도적질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과 몸져누움.


커튼의 삼색제비꽃 무늬. 찻잔의 장미 문양. 이런 것만 봐도 입맛을 탈색하고 몸이 말라간다는 봄이라는 이 기이한 구획물. 그 좋은 봄밤에 흰물쥐들은 밤의 호수에 출현해 말라가위라는 이상한 왕국을 세운다. 마르다, 말라가다. 춘수


나는 그곳에 휘앙세라는 물자전거를 타고 식료품 배달을 간다. 빨간 엽기 떡뽁이와 마라탕들. 이런 것이라도 먹고 일어나시오. 어서 일어나 애당초 없는 인생이라는 선. 면. 구체를 바라보시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올가 토르카츠크 ‘방랑자들’


밤의 공원에 가득한 선, 면, 구체. 그것들의 이합집산. 부서지고 흩어지는 빛과 물의 일렁임. 찍찍거리는 흰물쥐들의 속삭임. 인신공여를 기다리는 듯 찍찍대는 그곳에 꽃의 제물Ofrenda de flores 대신, ‘인생’이라는 무형의 것을 공여하시오.


밤의 공원은 침묵의 검은 숄을 두르고 기꺼이 물자전거를 탄다. 인간의 시간은 줄자의 눈금으로 미세화되다 부서진다. 너무나 완벽한 물의 파편들. 물방울의 부스러기들. 물의 실금들.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올가 토르카츠크 ‘방랑자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휘앙세라는 물자전거가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새벽 세 신데 밤의 호수라는 발신자로부터 전화가 온다. 물은 발송실패의 실선으로 흐른다. 흐르다 사라진다. 물의 검색엔진에 그곳의 지명을 쳐본다. 물이 폭탄처럼 터진다. 그곳에서 물의 난민들은 지하벙커로부터 사상자없이 피난했다. 물의 벽에는 포탄 자국이 선명하다. 가혹한 것들이 진행 중이다. 포말이 폐왕의 머리에 놓여있는 벗을 수 없는 왕관 같다.


진실은 가혹했다. 뭔가를 글로 쓴다는 건, 그것을 파괴한다는 의미였다. ... 말라비틀어진 사과 속처럼 케케묵은 공간, 그리고 먼지

-올가 토르카츠크 ‘방랑자들


물에서 먼지가 펄척인다. 물에서 안구건조증이 일어난다. 물에서 버석버석 모래가 늙어간다. 인생의 세세한 질문에는 답이 없는 모래. 부서지는 모래는 모레와 다르다. 모래. 모레. 세모래. 사라지는 백사장들. 물의 대드 밸리들. 그속에서 쓰러지지도 못하고 영원히 말라가는 불멸의 퀴버 나무들.


종이 위에 서로를 불멸로 남기고, 서로를 플라스티네이션 처리하고, 문장의 포름알데히드 속에 서로를 담글 것이다.

-올가 토르카츠크 ‘방랑자들’


녹슨 방랑자들의 물자전거에 휘앙세라는 이런 말이 남았다면. 차라리 누군가 이런 말이라도 손톱으로 새겼다면. 우리는 그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딱 세 개뿐인 그 눈금을 밤의 호수에 방부 처리할 것이다. 돌은 액화되고 물은 플라스틱화될 것이다. 마치 먼 바다를 흘러온 송진이 굳어 호박이라는 보석을 만들 듯. 나는 그곳과 약혼할 것이다.


우리는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라는 이름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돌멩이를 건지러, 그 오싹한 물의 심연에 갈 것이다. 휘앙세라는 이름의 자전거가 있다면.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올가가 토카르추크 (지은이),최성은 (옮긴이)민음사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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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né Magritte, The Empire of Light, II (1950) oil on canvas ; 78.8 x 991 cm, M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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