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수염

이문숙#아르코문학창작기금선정작

by 시인 이문숙

*정약용의 ‘죽란시사’, 살구꽃 피면 첫 모임을 갖는다/복숭아꽃 피면 봄을 보기 위해 다시 모인다/여름 ‘참외’가 익으면 다시 만난다


방범등이 땅거름을 감지하고 탁 켜진다. 순간 그 아래 걸어가던 장바구니 든 그림자는 수도자의 검은 두건을 쓰고 있다. 어느덧 길은 수세기 전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진다. 포석이 발꿈치에서 현처럼 울린다. 절벽에 매달린 폐허 직전 수도원 불빛 아래 수도원장 살레시오는 앉아 있다.


흑단목 책상 위 검은 잉크가 얼어붙는다. 뜨거운 촛농이 맨발등에 떨어질 때마다 고여 있던 적요가 더 커진다. 동방의 나라에서는 이걸 '적멸'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적멸보궁 혹은 서가헌. 저물녘이 아름다운 집. 나 살레시오는 외전을 읽는다. 마리아가 오늘은 혼처를 찾는 구혼의 날. 네거리 광장 마리아 앞에 긴 줄이 이 궁벽한 수도원 불빛까지 이어진다.


장안의 온갖 남정네들이 손에 막대기 하나씩을 들고 차례를 기다린다. 이발사와 날도둑, 푸줏간 주인, 금은방 집 도련님, 난봉꾼, 탄광 승계자 그리고 백년서생, 악사들이며 거간꾼. 마리아는 그들을 하나씩 맞이한다. 막대기든 지팡이든 긴 홀이든 부지깽이든 마리아가 받아들면 거기서 꽃이 피어나야 한다. 그 사람만이 남편이 될 수 있다.


남자가 마리아에게 막대기를 건넨다. 아니다. 이 사람도 아니다. 아니다. 후장파 시인 마르께스는 화가 나 막대기를 분질러 버린다. 다 거짓말이야 다 사기에 불과해. 꽃피는 막대기. 누구의 막대기에서 그런 기적이 벌어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자. 글자가 뭉개지고 손가락은 얼어 감각이 없다. 그때 촛농으로 마루를 윤내던 수녀 바울리나가 얼른 손을 잡아준다. 따뜻하다. 수녀 바울리나는 해종일 레이스를 짠다. 손가락에선 구근이 자란다. 나는 이 구근을 만지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그녀는 내가 추워서 오들댈 때, 나를 위해 이상하게 하얗고 가는 비올라의 현 같은 걸 한소끔 끓여준다.


이걸 동방의 나라에서는 '국수'라고 부르며 세기의 요리사는 '먹을 수 있는 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허나 나 수도원장 살레시오는 그걸 '먹을 수 있는 현'이라 일컫는다. 호르륵 마실 때마다 천상의 음악이 오므로. 오늘 나 수도원장 살레시오는 판관들 앞에 앉아 있다. 수사 야고버가 나를 고발했다. 내가 금기를 어기고 수녀 바울리나의 손을 만지고 통정한다고.


나는 파문 바로 직전이며 추기경 나보르는 나를 평생 사역에 보낼 지도 모른다. 수녀 바울리나의 눈에는 잔뜩 공포의 그으름이 낀다. 오늘은 기여코 법정에서 내 죄를 실토해야겠다. 붙였던 가짜 수염을 떼고 요란한 수단을 벗고 나 수도원장 살레시오는 여자 에우제니아임을 고백해야겠다. 그래야 그녀의 파계와 노역이 사면될 터이니. 나 수도원장 살레시오는 묘역 관리인이나 떠돌이 개와 함께 이 거리 방범등 아래서 부서진 악기나 켜는 노숙인 악사가 되길 바랬다.


여자가 수도원장이 될 수 없는 시대에 머리칼을 모자 속으로 틀어올리고 남성의 목젖을 돋워 남자 목소릴 내고 가짜수염을 붙여여만 했다. 그걸 동 트기 전 거들어준 건 수녀 바울리나다. 불빛이 때려눕힌 그림자가 다시 검은 두건 쓴 남장수녀 수도원장에서 이제 장바구니 든 평범한 여자 에우제니아로 돌아온다.


나는 오늘 우리 동네 가장 햇볕 바른 묘역에 정원 하나를 수녀 바울리나와 만들었다. 은모래에 돌멩이 하나. 거기 얹어놓은 방금 떨어진 참외꽃 하나.


아침의 나라 그곳에는 '죽란시사'가 있어 노란 참외가 영글면 모여 시를 읊는다. 청개화성(聽開花聲)으로. 가로등이 어둠을 감지하고 딱 켜지는 한 순간, 나는 어느덧 폐허의 수도원장이 된다. 장바구니에 급류처럼 새파란 파 한 단 달랑 짊어지고.


*낙서옹알이, photo by 이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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