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숙#아르코문학창작기금선정작
-음료가 뜨거우니 조심하십시오
열리지 않는 은주전자에 매달린 사람 같았다. 비상계단이 축 처진 식물 같았다.
생계절벽에서 돌들이 굴러나올 때 뚜껑은 어느덧 함묵했다. 물은 들어있지 않은 것 같아. 주둥이에선 가느다란 흰 김이 흘러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환풍기 위에 올라온 기분이야. 뜨거운 물 솟는 분수가 외치는 목소리 같았다. 죽지 않을 만큼 화상을 입고 이곳에서 솟구쳐.
은주전자의 세공은 무료급식소의 긴 줄처럼 정교하고 그칠 줄 몰랐다.
액자 유리 위에는 고공농성중인 사람들이 지상에 벗어놓은 신발처럼 양면테이프 자국이 끈적거렸다.
촉탁사원처럼 빙빙 돌며 은주전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속에는 관둘까 말까 하는, 가느다란 실랑이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손잡이는 높은 승강장 같았다. 가끔 구름의 에어백 터지는 소리가 났다. 펑!
살살 다루지 말고 쾅쾅 쳐. 때리면 기계가 가끔 말을 듣기도 해. 폭력은 정교한 세공사 같았다.
양면 복사기가 종이를 꾸르럭거리며 뱉어냈다. 쏟아지는 이면지가 정오의 웃음을 터뜨렸다. 차양 없는 모자를 쓰고 외계어들이 부서졌다.
벽에 걸린 액자 속 은주전자가 크레인 꼭대기에서 떨어져 나뒹굴까봐 망설이는 페이퍼 쨈의 하루 같았다. 그 연속 같았다.
그때마다 누가 걸어두었을까. 액자 속 은주전자를 올려다 봤다.
아주 가늘고 하얀 종족들이 은주전자에 살고 있었다. 은주전자를 흔들어 컵에 따르면 그속에 살고 있던 사람이 쪼르륵 흘러나왔다.
그것은 흐르는 물도 흰 김도 아니었다. 초과된 모든 것들을 액체로 생각해. 은주전자에서 흘러나온 얼굴을 흰 컵에 담아 마셨다. 어룽대는 빛 속에 모르는 얼굴이 그득했다.
어떻게든 들러붙어 있어. 양면복사기가 파랗게 울었다. 양면테이프가 끈적거리며, 그만 여기서 놓여나고 싶어 외치는 두 팔을 두 다리를 붙잡아 벽에 걸어 두었다. 액자에 넣어두었다.
*마두도서관 2층 열람실로 가는 계단에 걸려 있었다. 그 액자 속 은주전자를 올려다보면 그 안에 ‘하얀 종족’이 살고 있는 듯했다. 높다란 은주전자에는 뚜껑까지 비상계단 같은 게 걸쳐져 있었다.
*셀피, photo by 이문숙
#아르코창작기금#시#직장생활#복사기#노동
#prayfor이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