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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이문숙 Sep 15. 2024

이산가족의 날을 아세요

-락킹체어

바다가 없는데

보랏빛 백사장 펼쳐져 있다


수천 송이 포도를 짓이겨 물들여 놓은 것 같은

보랏빛 모래 보랏빛 풀

보랏빛 흙


연고자 없는 공동묘지

털왕꽃게 아닌 족제비가 파놓은

구멍 구멍 구멍들


그 구멍 하나씩 차지하고

어린 우리는 왕 놀이 시녀 놀이를 했다


오늘은 전쟁 놀이할까

구멍에서 흘러나온 뼈 조각으로

깃발을 세우고

적병들의 귀와 코 대신

풀꽃들을 잘랐다


선생님 포도밭에서 따온

포도를 짓이겨 피를 만들었다

바다가 없는데 보랏빛 파도가 쳤다


과묵한

선생님은 딸 여덟을 낳고 집에 가지 않았다

무연고자 묘지 아래 살았다

포도나무를 한 주씩 늘려갔다


선생님은 봄 여름 가을

죽도록 포도만 가꾸고 포도만  따고


오늘은 거름을 내야지

내일은 소독약을 뿌려야 해

보랏빛 안개 쏟아지는 분무기


독한 소독약에 쓰러졌다

그런데도 포도는 영글었다

주렁주렁했다


사모님이  갓난아이를 업고

포도밭을 왔다


남편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모님은

선생님 어서 일어나세요

당신 아들이 왔어요

어서 눈을 떠봐요


여름 홍수에 헐벗은 무덤

그것은 왕의 의자 같았다


흔들리지 않는 *락킹 체어rocking chair

왕실에만 납품할 수 있는

과일 덩굴이 그 의자에서 자라올랐다


포도상구균같은

포도 같기도 하구 아닌 것 같기도 하던

기이한 과일들


늙은 선생님의 갑자기

나타난 어리디어린 아들


갈 수 없는 북한에는

아직도 자수 장인들이 많다 한다


중간 매개자를 통해

북한 자수공에게 의뢰해서

완성한 자수 조각을 붙여 제작한

*유령 그리고 지도


선생님이 북에 두고온 아들이

어떻게 포도밭에 왔다

짓이겨진 포도에 손이 젖었다


사실은 어디서 사모님이

데려온 아기인데도

기이하게 선생님 병이 다 나았다


포도가 영글었다

포도밭이 점점 넓어졌다


인광이 튀는 무연고자 무덤은

파묘 공고가 붙었다


바다가 없는데

누군가는 그 보랏빛 파도에 익사했다

갈 수 없는 북


돌아가신 아버지 엄마는 북으로 가셨을까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만나고

엄마는 남편을 만났을까


식탁 위 포도송이가

접시에 오늘은 앉아있다


왼발은 제자리에 두고

오른발을 앞으로

왼발을 뒤로 옮기며


흔들림 없는 흔들의자처럼

바다 없는 보랏빛 파도처럼


추석 이틀 전은

이산가족의 날

언제 누구에 의해 제정되었을까


올해는 9월 15일 일요일

언제 이 날은 사라지게 될까


해마다 추석은 바뀌니

날은 매해 달라진다


자수공을 찾아나서는

익명의 중간자들

‘미들 맨middle man’처럼


*함경아의 전시회 제목

*쉘위댄시shall we dan詩, 연작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써야지. 춤추듯 시를 토슈즈 없는 맨발로 발바닥이 벗겨지고 발가락이 툭 떨어지도록.


*스텝락킹체어#남북통일 #이산가족#추석#쉘위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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