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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이문숙 Sep 20. 2024

과일 노동

-아라베스크

있잖아요

지나가는데 누가 말을 건다


어떤 집의 문 손잡이다

입 벌린 사자 아니고

여자다


과일 바구니를 이고 있는 여자

손잡이 장식


무거워요

이제 좀 내려놓고 싶어요

나에게 과일 하나를 준다


마침 나는 목이 마르다

과육은 부드럽고 희다


골목은 희고 정갈하고

이파리 하나 없다


어떤 집에는 부속물처럼

연못이 딸려 있다


송장헤엄물방개가 떠돈다

고요하고 깊은 물 속이다


헤엄물방개에

송장이라는 말을 붙이니

물은 더 고요한 것 같다

극도의 고요


있잖아요

문고리 속 여자가 또 나를 부른다

여자가 과일을 또 내준다


여자의 숨

좀 헐거워진 것 같다


다리를 곧추세운다

오른발을 딛고

왼쪽 다리를 뒤로 뻗는다

 손을 벌린다


과일에서

덩굴들이 뻗어나온다

길고 가늘고 끝없는

*아라베스크arabesque


손바닥은 연못으로

손등은 하늘로


절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선 안된다


송장헤엄물방개처럼

고요를 답습한다


은행을 가다가

횡단보도에 서서

불신 지옥 앞에서


여자는 또 있잖아요

말을 건넨다


버려진 인형 앞에서

인형의 떨어진 눈 앞에서


아라베스크는

식물에서만 문양을 꺼낼 수 있다


인간과 동물

심지어 인형에게조차 안된다


이제 좀 쉴 수 있게

이 과일 좀 받아주세요


아랍 어떤 나라에선

인형 반입이 금지된다고 한다


머리를 떼면 갖고

들어갈 수도 있다지만


머리를 떼다니

끔찍도 하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느덧 손잡이 속 여자가 나타나

과일 하나를 또 내준다


지칠 때마다  여자가 다가와

긴 팔 긴 다리에서 문양을 꺼내

아라베스크한다


다시 가보지는 않는다

그 골목 찾을 수 없다


문고리 속

여자가 여전히 과일 바구니를

이고 있을까봐


송장헤엄물방개처럼

극도로 고요한 골목


나는 답습한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저도 모르게 그 여자의

동작을 따라한다


발꿈치를 들고

다리와 팔을 쭉 뻗어

휘청대지만 곧바르게


힐끔대던 교통보호대  

노인도 같이


다리 울퉁불퉁 솟은 정맥도

연속무늬 문양으로


간식으로 챙겨온 후무사 자두도

머리 덜렁대는 버려진 인형도


문고리 속 그 여자가

주는 과일을 받을 때마다


헤엄물방개처럼

고요하게 답습한다


멈췄다고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길게 뻗어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쉘위댄시shall we dan詩, 연작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써야지. 춤추듯 시詩 한 켤레를. 토슈즈 없는

맨발로 발바닥이 벗겨지고 발가락이 툭 떨어지도록.


#쉘위댄스#폭염#기후행동#스텝#아라베스크#너의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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