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나날'
4월은 자루처럼 '무언가'로 불룩해지고 '어떤 곳'으로 가득 채워진다. 그러다가 점점 '소홀해지는 공백'처럼 허술하고 허전해진다. 어떤 파동으로 '파르르했던 자루'가 터진다. 돌풍이 오고 먼 산간에는 우박이 후둑 듣는다. 불안의 딸들이 하얀 옷자락을 흔든다.
베란다에서 그 희디흰 불안을 흔들어 꼭 짜보니, 세상엔 쫀득쫀득한 비가 온다.
색소가 잔뜩 든 '쫀드기' 하나로 나른한 오후를 건너가던 어린 날의 4월.
4월아, 너는 기억하니. 비쩍 마른 '해피'라는 이름의 하얀 개와 공책 하나 사기 위해 동네 모든 소녀들이 대청마루에서 코바늘로 뜨던 아후강 꽃받침. 뒤란의 붉은 흙. 그 위에 후욱 끼치던 설탕처럼 부서질듯 흰 얼굴의 '설희'네 고추건조장에서 나는 빨간 매운내. 그때의 헛된 가난과 침묵의 날개 없는 말들. 말의 따금거리는 속눈썹.
메리 올리버Mary oliver는 '완벽한 나날Long life'에서 '시는 산문과 다르게 말에게 날개를 달아준다'고 쓴다. 쟁기처럼 튼튼하고 쓸모있는 '마구'가 아닌 날개.
그때는 그랬었다. 날개를 날개쭉지에 붙이려 해도 등은 조브장히 어두웠고 마당의 펌프물은 자주 미세한 모래알을 뱉어냈다. 닳아빠진 칫솔로 박박 문질러 빨아도 흰 운동화는 하얘지지 못했다. 책은 쉽게 아궁이의 불쏘시개가 되고 공책은 점점 '악화되가는 공백'. 펼치면 하얀 단면이 파고가 높은 바다처럼 두려웠다.
그때 4월아, 너는 연필 한 자루를 내게 주었니. 하릴없는 내 가난한 어린 날에, '파손 주의fragile' 라고 써진 연약한 소포처럼 너는 이곳으로 연필 한 자루를 배달해 주었니. 진달래 가지로 만든 연필 한 자루. 흑연이 까만 눈동자처럼 박힌.
이백의 '몽필생화'. 그는 매일 시를 써. 시시각각 미친 듯. 그리고 발기발기 찢어버려. 연필을 다 부러뜨려. 그러던 어느날 꿈 속에서 '꽃 피는 붓'을 보지.
흙 이랑에 연필 한 자루를 심고 물을 주고 불면의 밤을 끄적거리고 손발이 떨어져 나간 문둥이가 혼자 있던 빈 집, 울타리에서 내게 벌려 보이던 하얀 자루.
진달래 피고 앵두꽃 피고 맨날 맨날 헛바퀴. 그 오고가고 매양 같던 공회전의 4월, 나에게는 그 '꽃 피는 연필' 한 자루가 있어 그 헐벗은 흙손이 같은 불안의 날들을 건널 수 있었던 거니. 어쩌면 '마구'가 될 수도 있는 어린 날. 날개의 한 잎 깃털을 만질 수 있도록 내 공책 앞에 살폿 놓였던 거니.
메리 올리버는 말한다. '가자미, 일곱'에서 '세상에 시작하고 전진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연필은 없어.'
일단 써봐, 오늘도 연필은 속삭인다. 이 악명 높은 삶과 소홀함에 대해.
별 보는 잉어처럼, 깡충거미처럼, 참솜깃오리처럼, 물레고둥처럼, 흉내지바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