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먼지의 힘

-하루 1440분 중

by 시인 이문숙

나는 한 줌 먼지 속의 공포를 보여 주리라

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

-T.S.Eliot의 ‘황무지’에서


오후의 빛 비껴든다. 이 빛을 햇덧이라 불러도 되나. 창가 옆에서 덧니를 감춘 여자가 입을 가리고 웃는다. 햇빛은 야윈 무릎이 드러나서 덧댄 치마의 덧단처럼 치렁댄다.

그 햇덧 속으로 먼지가 출렁거린다. 굳이 먼지들을 세어본다. 조롱 속에 매달린 쿠마의 무녀처럼. ‘죽고 싶어.’ 셀 수 없는 먼지만큼 파멸의 지속만 있는 긴 시간. 조롱 속 그녀는 중얼거린다.

먼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영멸의 아득한 시간에 대한 환유이다. 늙고 쭈글거리는 불모의 환청을 듣는 시간. 다시 젊음을 청하지 못한 시간의 항아사. 그속에서 죽음과 생은 서로를 배타하면서 배태한다.

내가(새가) 동공을(부리를) 유리창에(바위에) 비빌 때마다, 대형 유리창이(바위가) 먼지로 다시 고동쳐 가는 시간. 다시 무수한 먼지들이 말오줌나무 거대한 잎 툭툭 떨어지는풍경을 담은 대형 간유리로(거대한 바위로) 다시 환원되어가는 순간의 햇덧.


모든 서 있는 것들이 서 있는 무게로

스스로를 공중으로 날려 버리는,

늙은 사과나무가 더욱 빨간 사과를

뿌리 뒤틀어서 구워내는 힘

- ‘공중먼지를 추억한다’에서


최창균의 먼지는 조롱 속 쿠마가 세는 염세적 먼지와 다르게 읽힌다. 그 먼지는 늙어 말라가는 나무와 고사된 나무 같은 죽음의 자리에 위탁되어 있지만, 먼지는 어디론가 떠나 다시 유전하고 환생한다.

벼락맞은 대추나무 자리에 봄쑥을 불쑥 들어올리고, 늙은 사과나무는 그 힘으로 더욱 빨간 별의 금화거나 감홍 같은 이름의 사과를 구워낸다. 그의 시에서는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씨방으로 공중에 같이 맺혀 있다.

죽음과 생이 서로 꽉 맞물려 그의 먼지는 풍요의 뿔 속에서 부유한다. 그러면 시인에게 나무와 풀이 먼지로 떠도는 공중은 어떤 곳일까. 몸을 진동하며 오래 스스로를 추억하는 공중이라는 곳은.


더 큰 나무을 만들기 위하여

나무를 자르면 허공이 움찔했다

나무가 떠받치고 있던 허공이 사납게 찢어졌다

.......................................................

허공이 떠난 빈 자리에 새순이 불끈 솟아올랐다

돌아온 허공이 봉긋 부풀어 오르고

나무는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오동나무’에서

그의 허공은 단순히 텅빈 곳, 아무런 잉태도 전이도 할 수 없는 부재의 공간이 아니다. 헛허구렁이 아니다. 그곳에선 하나의 가지가 찢기면서 허공도 같이 찢겨진다. 새순이 올라온 자리에 허공도 같이 불룩해진다.

그는 그 나무에서 ‘방금 태어나는 여자애의 자지러지는 푸른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의 시에서 허공은 깊고 우묵하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현비 玄牝.’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다. 우주만물이 다 이곳에서 나온다. 만물의 근원인 이곳은 소진될 날이 없고 그 쓰임이 다함이 없는 검은 곳이다.

그의 허공은 어머니의 그으름 가득한 검은 부엌이며 아궁이다. 그곳에서 늙은 나무는 뿌리를 뒤틀어 그의 새끼인 열매들을 따끈하게 구워 이 세계에 흔쾌히 제공한다.

‘구만 리 허공하고 내통하여 태허복중太虛腹中에 나를 배고 있는 사물들.’ 그 태허복중의 싱싱한 혼란과 최창균의 공중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먼지는 거의 같은 의미로 읽힌다. 먼지들이 기억하는 영멸의 시간. 그 속에 최창균의 공중먼지는 놓여 있다.

그는 태허복중과 같은 말을 끌어오지 않고도 공중의 힘을 희박하게 강렬하게 말할 줄 안다. 그 자체의 허공 속에 생명을 만들고 허무는 공중의 붉고 푸른 불그죽죽한 저력. 그는 소처럼 우직하게 있다. 주검조차 공중으로 들어올리면서.


풀밭에 맷돌같은 이빨을 묻고 있네

똥과 오줌으로 풀밭의 너른 영역 누비고 잘 살았던

소 한 마리 그만 풀밭에 아주 눕고 있네

..............................

죽어 더욱 그윽해진 눈 속으로 뛰어드는 풀들이

고스란히 저 주검을 밀어 올릴 것이네

풀이었던 초록의 몸뚱아리

공중으로 망울망울 터뜨려 올릴 것이네

-‘소가 아주 눕다’에서


산해경처럼 말해 보자. 깊고 우묵하여 들어서면 빠져 나올 수 없는 이곳이 현실의 궁산窮山이라면, 그로부터 북서쪽으로 십여 리, 화전이라는 곳이 나온다. 그곳에는 사철 지지 않는 오색도화가 발색한다. 그 꽃들은 물빛 수색水色에 궁지의 말을 대고 있어 그곳을 지나기만 해도 마음이 파찰을 일으킨다.

그로부터 수백 리 운정雲井, 그곳에는 구름이 두텁다. 비늘구름 첩첩한 우물은 들여다 보기만 해도, 멀리 어유지리魚遊之里에서 물고기 유랑하는 소리가 철썩철썩 울린다.

그곳에서 사오 리를 돌아오면 하루 1440분 중 일상에 헌신하고 ‘그리고 겨우 남아 있는 몇 분을 네 다리로 밟고 다시 내일로 이동해가는’ 소(‘소의 하루’)가 있다.

궁산의 속절없는 먼지들이 까마귀처럼 까욱대며 자욱한 사물의 안을 휘젓고 헤집어 보이는 동안, 그 물성의 결을 무덤덤히 새겨 공중먼지로 띄어올리는 최창균의 시가 여기 있다. 소와 시를 창의적으로 사육하는 그가 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면 육질이 부드러워진다고 믿는 미련한 양돈업자 같은.

일조량 줄어드는 11월 창가, 손바닥 속 먼지의 공포가 아닌 먼지의 열락을 들여다본다. 늦가을 짧은 햇빛을 덧없음으로 여기지 않고 덧붙임으로 난독할 때, 이것이야말로 무구한 ‘미련함’이 아닌가. 대형 유리창 위로 부유하는 먼지들이 비단향무꽃으로 군무하는 찰나가, 덧댐의 덧없음.


#프리드리히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최창균시인#농부시인#이문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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