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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의 연대기

-곰숙과 놋

by 시인 이문숙

4교시가 시작되었다. 점심 배식을 앞둔 급식 카의 요란한 바퀴 소리와 함께 복도를 넘나드는 음식 냄새, 특히 고추장 제육볶음 같은 거. 아침을 거른 뱃가죽들은 더욱 주글거리며 꾸륵댔다. 수업은 무슨 수업. 정신의 양식이 육체의 양식보다 고귀하다구. 4교시에 이런 현자의 시금석 같은 선언과 정언명령.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기적 없이 4교시의 홍해를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까. 교실 문을 드르륵 열었다. 점심 시간을 앞둔 다른 때는 무력한 고요 속에 빠져, 나는 4교시를 혼자 허우적대야만 했었다.


그러나 예상을 거슬러 아이들은 일제히 나를 향해 소리질렀다. ''곰숙 샘, 곰숙쌤, 곰쑥쌔앰'


그 환호를 이해하지 못한 내 눈꼬리는 먼저 발칵 열렸다. 내가 무슨 곰숙이라고. 왜 내가 왜 곰숙이야 왜. 나는 곰처럼 뚱뚱하지도 않고 잠퉁이도 아니다. 느려터지지도 뭉그적대지도 않는다.


그토록 이기적인 인간 사람이 피신해서 매달려 있는 상수리나무나 갈참나무 아래서 빙글대지도 않는데 왜 곰이란 말인가. 왜 발 아래는 늘 가시 센 밤송이만 굴러다니고 따끔댄단 말인가. 발바닥은 찢겨 피가 나고 지는 황혼처럼 지혈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홍해처럼 붉디붉다는 말인가.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곰숙샘, 지난 수업 생각해 보세요. 360도, 물구나무, 물구나무.’


지난 시간에 우리는 르네 마그리트의 신발 끈 꿰어진 맨발과 밤과 낮이 환치된 빛의 제국을 보며 생각을 회전하는 방법에 대해 일명 뇌 쌓기라고 부르던, 브레인스토밍을 하였다. 푼크툼punchtum이란 말을 슬쩍 찔러놓고. 영원히 지혈되지 않는 황혼처럼.


그래, 문숙을 물구나무 세워보자. 그러고 보니 아니, 문은 곰이 아닌가. 곰곰곰곰. 발령 초기 내 첫 별명은 레오 리오니Leo Lionni의 '잠잠이'었으니. 나는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이 동화를 한 장 한 장 펼쳐 보이며 읽어 주었었다. 거기엔 개양비귀꽃을 들고 눈꺼풀 감긴 꿈꾸는 생쥐가 주인공이었는데, 괘씸하네. 내가 곰이라니. 하긴 줄곧 나는 '곰곰 생각한다'의 '곰곰'을 사랑하였으므로. 그렇다면 좋아 받아들이자, 곰곰.


아, 난 곰곰 곰숙.


그때부터 교훈 성실은 실성이 되고 공수라는 배꼽 인사는 공습이 되었다. 암튼, 모든 상상력의 원천은 실성이라는 반역과 전 세대 익숙한 것들에 대한 ‘단정하리만치 치열한’ 공습에서 비롯되는 거니까.


나는 숱한 별명의 이력서 중에 곰숙이라는 별명을 가장 사랑하여 아직도 곰쑥이라고 여기저기 사용하고 있는 중. 연서의 애들아. 증산교 물빛 너머 수색 기차역이 있던 곳. 수색 역에서 143번을 타고 매일 갔던 곳. 1990년 9월 가을 홍수, 한강이 범람하는 천재지변으로 딱 한 번 가지 못했던 곳.


국민학교 6학년 때인가. 경상도 출신 담임 선생님, 아니 요즘 말로 더욱 다정하게 불러보자. 그때 그 ‘담탱이.’ 그는 나를 ‘문둥아, 문둥아’하고 놀리곤 했다. 70년 초반 만해도 그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워진 눈썹, 손가락 떨어진 손으로 양식을 구걸하곤 했으니. 슬프게도 나는 나를 부르는 그 말에 자주 수치와 오욕을 느꼈다.


어느날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내가 말한 ‘문둥아’는 그 뜻이 아니고 ‘문동文童’이라는 거야. 글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 오해를 풀어. 나는 여전히 뚝뚝한 경상도 말투의 곱슬머리 ‘담탱이’ 앞에서 쓰러질듯 서 있었다. 아직도 교실 왼쪽 창가에 붙어있던 선생님의 오래된 책상이 생각난다. 그 책상 어귀까지 뻗어들어온 붉은 담쟁이 넝쿨도. 언젠가 내 별명의 연감표를 쓰리라.


문숙의 '숙'을 물구나무 세우면 좀 이상한 모양의 ‘놋'이 된다.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 에서 그 쟁쟁한 놋주발 소리. 아, 놋도 조타아! 소리들이 누적되고 있다. 맑고 새되면서 희디희게 낮은.


지혈 안 될 것만 같던 황혼이 풍부하게 갈앉고 있는 시간이다. 부드럽게 감긴 생쥐의 눈꺼풀처럼 ‘쨍쨍’이 ‘잠잠’과 ‘곰곰’으로.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서


- piicture by 나의 마지막 학교 아이들

그림1. 배꼽 인사 공수, 단정한 공습.

그림2. 시계가 흐물흐물, 짝퉁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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