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1세 처자의 말, 히믈리쉬하다

-매와 황조롱이

by 시인 이문숙

육교를 사랑하였다. 반달칼처럼 예리한 육교.


그곳에 서서 하염없이 몰려오는 붉은 미등의 물고기떼도 보았다. 해저터널 아래로 밀려드는 해수의 '찡'하는 울림도 들었다. 가끔은 그곳에서 뛰어내린 나의 사정없이 부서진 몸도 보았다.


그곳에 서면 해븐리병원의 불빛이 먼저 눈 속에 안착하였다. 피붙이의 임종을 혼자 지켜보았던. 혼자 두려웠다. 무서웠다. 벌어진 입을 다물게 하려고 내내 턱을 받치고 있었다.


육교 옆 주욱 늘어선 가로수 말버즘나무 방울들이 흔들려 온다. 그럴 때면 요양병원, 연변 출신 간병인들의 거친 말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환자는 무거운 상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실재하는 몸은 달랐다. 모든 기능이 정지되었는데도 귀밥은 흘러넘쳤고 수염은 까슬했다. 나무 토막의 몸 안에서도 눈빛은 온전히 흔들렸다.


육교에 서면, 바로 아래 화궁이라는 중국집에서 짜장면 볶는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 맞은 편 아이리딩 센터 간판 속 올빼미는 눈과 부리가 또록하였다. 몸과 마음은 각각의 욕구 속에 비트러졌다. 어긋났다. 충돌하고 바수어졌다. 난 그것이 몸이든 마음이든 소속 불명확한 허기를 움켜쥐고 허겁지겁 육교에 올라오곤 했다. 숨이 턱에 걸리는 순간이 좋아서였겠지만.


육교는 매의 눈은 아니지만 황조롱이의 시선쯤은 돌려주었다. 눈이 멈춰 있던 발치에서 시선을 올려 조금 더 멀리 보았다. 멀리 보려고 했다. 고봉도 보았고 한갓 구름이 노을에 빨려드는 것도 지켜봤다. 정보산업고 아이들의 가난하지만 튼실하고 환한 종아리도 보았다.


그곳에 서면 '히믈리쉬 himmlisch' 라는 말이 따라왔다. 8차선 도로에서 질주하는 차들이 나의 내장 속으로 흘러들었다. 모든 것이 으깨져 내리고 곤죽이 되면 알 수 없는 먼곳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멀리, 대방 트롱프니엄-이러한 조어들은 속악하다. 가뿐한 승리가 싫고 마구 패배하고 싶다- 공장형 아파트 건물의 유리 표면으로 노을이 슬라이딩하고 있다. 번쩍번쩍했다. 얼어붙은 계단을 내려가던 어슷한 오후 5시는 스프링 노트 한 쪽을 '뿌욱' 찢어 이런 안내문을 걸어두기도 했다.


'얼음 녹을 때까지 절대! 이쪽으로 내려가지 마세요. 정 내려가시려면 손잡이 꼭'

- 발 딛자마자 슬라이딩한 21세 처자


이 숱하고 숱한 말라 마라 마세요의 세계에서 이 '마세요'는 흐뭇하였다. 따사로웠다. 풋풋하였다. 손잡이 꼭. 꼭 붙들고 살고 싶다. 붙들어 주고 싶다.


육교는 가끔 이렇게도 속삭여준다. 이곳은 미끄러우니 돌아가세요. 돌아가세요 요요요요. '돌아가세요'라는 말이 삶의 전반을 울리고 있다. '손잡이 꼭'과 함께!


(사실 이 육교가 귀찮아 무단횡단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곳 어떤 시민들은 이 낡은 유물을 폐기하라 하지만, 육교는 거기 올라서면 다른 시선을 준다. 직선이 아닌 반半곡선, 반원의. 그렇다고 환상의 무지개를 떠올리지는 말라. 근거 희박한 낙관을 제시하지 말라.)


반곡선은 현실에서 탈주하고 싶은 탈옥수의 다리이며 비탄의 건널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기이하고 편협하며 예리한 반달칼이며 반反 이승적이다. 히믈리쉬하다.


히믈리쉬himmlisch는 독일어로 '신비스러운, 이승의 일이 아닌 것 같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21세 처자의 메모처럼 도깨비적이다.


도깨비라는 드라마는 미장원에서 본 1 회가 고작이지만, 나도 가끔 이렇게 육교에서 예쁜 도깨비를 체험하게 된다.


단어는 아름답고, 단어는 정확하고. 단어는 승리한다

-에르베 기베르 ‘연민의 기록’에서


작은 메모 속 언어는 이렇게 정확하고 이렇게 아름답고 때로 승리한다. 심지어 도깨비적이며 히믈리쉬하다. 기괴한 현실에 맞서싸울 예민한 반달칼을 주기도 한다.


#육교#얼음#다정한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