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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를 뭐라고 부르지

-카불의 꽃

by 시인 이문숙

겨울이 거울이 되는 오후다. 코 끝에 공기가 '싸'하며 파동음을 낸다. 갔던 금고의 창구 셔터가 내려졌다. 점포가 폐쇄된 줄 모르고 헛걸음. 예언자의 비타민 발포정 같은 먼지가 한바탕 셔터를 뒤덮었다.


다른 금고로 가는 길, 노쇠한 빛들은 추운 나무들에게 주유구를 들이밀었다. 그래서 거리 이름은 주엽(注葉)일 지도 모르겠다. 빛들이 해저에서 송출된 검은 석유처럼 반짝인다. 김구이 노점의 김이 검은 비단이 되기까지 걷는다.


마주오는 상조회 제복을 입은 여자가 마시던 컵을 입에 문다. 손이 시려운지 주머니 속에 두 손을 넣는다. 손 없이 반인반수의 예언자처럼 걷는다. 요즘 유행하는 체리빛 입술 주름이 카불의 꽃처럼 핀다. 흰 컵에 문양으로 남는다.


누르면 ‘어두운 숙명’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아코디언 입술 주름. 양 어깨에 견장이 무섭도록 번쩍댄다. 견장은 예언자의 퇴화된 날개일까. 물고 가다 결국 컵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검은 피 얼룩이 번지는 광장.


이런 풍경을 보고 고작 한 번뿐인 삶이 '사기'라고 말하면 반인반조의 그림자가 되어버릴까. 그러나 사무엘 베케트가 하면 돌연 대형마트 신선식품 코너 비닐랩을 두른 선홍빛 '붉은 살코기'로 바뀐다. 사이사이 적당한 뼈와 지방이 무늬를 이룬.


영어에는 '사기'와 연관된 말이 유독 많다. Con man, fraud, swindle, snitch, scheme, 심지어 plot까지. 어쨌든 생의 플롯은 잘 짜야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원문에 '사기'는 뭘까. 요즘 '사'자 들린 사람이 너무 횡행한다 한다. ‘사'자 들리면 안된다고 벌써 인생의 허무를 새겨넣은 미성년의 오후가 삶에 '눈꼽쟁이' 창 하나를 내다걸고 두리번댄다.


불어 사전에는 fraude, tromperie 등 사기에 해당하는 말이 역시나 엄청 많다. 마음사전 속에 사기는 뭐라고 정의될까. 어쨌든 그자를 웜이라 부르자.


사회관계망에서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유에스 아미U.S army 장군들이다. 아프리카 카불African kabul 같은 이국적인 곳에서 근무 중이다. 어깨의 매혹적인 금빛 견장을 번쩍거린다. 이 견장은 상조회 직원의 제복처럼 퇴화된 날개의 흔적일까. 카불의 하얀 만년설 봉우리들이 여기서도 보이는 것 같다.


그자를 웜이라 부르자. 하지만 한 번 더 사는 거잖아. 어디에나 늘 있는 그 삶을. 단 한 번만 살 수 있는 그 삶을, 이런 사기를 당하고서, 우리한테 소리칠 수 있도록

-사무엘 베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아악, 사기의 세상은 번쩍이는 견장을 달고 있다. 중간에 다리 놓는 ‘사’자가 있다. 이제는 눈망울 큰 아이와 귀여운 강아지와 사진 찍은 싱글을 가장한다. 사별이나 이혼남인 남자. 한번뿐인 삶이므로 그자를 웜이라 부르자.


횡단보도를 건넌다. 가끔 들르던 '착한 빵 이야기'도 블라인드를 내렸다. 안내문에는 '계란과 국산팥의 가격 상승으로 더 이상 점포를 운영할 수 없다'는 주인의 손글씨. 그 마지막 마음의 파동으로 덧칠된 볼펜 자국이 뭉개지고 번져있었다. 곳곳의 해저음들이 콧잔등의 주름을 접었다 편다.


동구청로의 가로수는 한겨울 폭설에도 은행을 떨어뜨린다. 얼음 속에서 알갱이가 물컹하고 밟힌다. 노란 화석들이 돌멩이처럼 따라온다. 빛의 잡화점을 지나 조악하기만 미관광장을 건너간다. 미관이라니. 그렇게 명명한 그자도 웜이라 부르자.


시멘트 가짜 목조 벤치에 빛 속에서도 녹지 못하는 눈사람 여자가 검은 비닐 보따리를 부둥켜안고 누워 있다. 건물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으려다 비켜준다. 다행이다. 지려던 햇빛이 거기 있어줘서. 그녀의 어깨에 빛의 견장이 달라붙는다.


'엄마, 나 취업에 성공했어' 청년 취업페어 광고용 현수막이 광장을 건너오던 바람에 부푼다. 이름도 외울 수 없는 '더비스트로’ 개업 준비 12시간 알바를 하러 간 미성년의 오후.


덜컥 셔터가 떨어진다. 떨어지는 건 세탁소의 셔터만이 아니다. 영혼의 세탁소. 겨울이 거울이 되는 오후다. 카불의 흰 꽃, 카불의 호수, 카불의 만년설이 보이는 오후.


#사기#판사검사의사교사#광기#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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