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다이어리

-이대후문 ‘밤의서점’

by 시인 이문숙

이건 노트북이다. 가로괘선이 가운데 스프링을 중앙으로 양면에 펼쳐진다. 몇십년째 고수해온 ‘eye soft’ 모닝글로리이다.


이건 무릎 위 기계다. 아니다. 탈脫 기계의 속삭임이다. 아니다. 아니다. 모나미 볼펜. 모나미 153의 갸르랑거림이다. 아니다. 버티의 골골 송이다.


딸기옆에 두 줄로 ‘Color zone releases eyes from a exhaustion’이라고 씌어있다. 그 아래 이 노트북을 쓰기 시작한 년도와 날짜가 따박따박하다.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다. ‘혹시 주우면 돌려주세요’, 노트를 갱신할 때는 맨 아래쪽 괄호 속에는 써둔다. 혹시’라는 단어 위에는 힘주어 방점을 찍어둔다.


이대후문 ‘밤의서점’에는 ‘10년 다이어리’라는 아름다운 장정의 굿즈가 있다. 다행히도 이 다이어리를 사랑하는 책방손님이 많다고 한다.


메리 루플은 울음일기crylog를 쓴다. cccc. 그날은 네 번 운 날이다. 하루도 안 울어본 날이 거의 없다. 나는 책 읽어본 지가 수십년년 되었다는 그분께 말한다.


맨처음에는 점이라도 찍어보세요. 마음에 늘께지근한 일이 있을 때. 그때마다 점이라도. 이 10년 다이어리에 찍어보시라고. 절대 이 다이어리 다른 사람 주지 말아야 한다고.


느닷없이 버티맘에게 말한다. ‘우리도 10년 단위로 갱신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


강산을 바꾸려면 10년 단위로 엄마도 국민도 아내도 동물 집사 역할도 재계약해야지요.


버티야. 왜 그런 제도는 없는 거니. 버티가 야옹하며 대답한다. 고양이 언어 번역기를 찾아본다. 아 이런 말이었구나. 백목련을 올려다보던 버티가 ‘아, 그거 새롭네요. 제가 만들어 보급할게요.’


백목련 속 분홍 속에 계란 빛 꽃술. 10년 단위로 너는 무엇을 갱신하고 있니. 버티는 버터플라이. 우리말로 나비. 종태쌀집의 고양이 이름 나비의 약아빠진 버전이네. (아니, 빤한 어리숙한, 순진하기 만한)


4월 2일 수

에릭 사티의 지시어 ‘충치를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백매를 파고드는 직박구리의 날선 부리를 봤다.


4월 3일 목

자개모란이 있다. 묵집 주방 찬모 팔순 할머니가 뜨거운 가스불 앞에서 일한다. 묵 쑤는 큰솥을 들어낼 때 꼬부라졌던 허리가 쫘악 펴진다. 이 비슷한 날들이 곧 도래하리라.


아들아, 바빠. 엄마 책에 네 군대 시절 얘기 나온다. ‘아이스크림과 사암’이야. 읽어봐. 아들이 읽어야죠. 어머니 저서인데. ‘어머니 저서’라니. 저애에겐 이게 근접하기 어려운 저서구나. 자개모란이 쿡쿡대며 웃을 일이다.


근데 자개모란이 필 것 같다. 할머니는 먼길 가기 전까지 맑은 묵을 쑬 것이다. 그게 남은 소원이라고 불 앞에 서서 허리를 다시 구부린다. 농부가 밭고랑에서 마지막 숨 거두길 고대하듯.


책 읽을 시간 없다는 아들이 ‘고거라도’ 읽어본다니. 자개모란은 필 것이다. 꽃병에 새겨진 모란이 피듯. 시인들이 거리에서 고생하는 걸 아주 멀리서 웅성웅성 지지하며 본다. 훗날 돌아보면 아주 고유한 봄이 될 것 같다. (부기: 2025.4.4 11:22)


4월 4일 , 렌토보다 아다지에토

그 버티맘이 준 간고등어. 산불 기부 답례품이란다. (나라 일이 잘 되었으니) 안동 간고등어가 조르바 댄스를 출 일이라며 웃었다. 기분이 좋아 버티맘과 사파이어 눈 샴 고양이 버티를 산책시켰다. 베란다에 제라늄이 작년에는 핑크였는데 올해는 흰색이다.


*모닝글로리 이 노트는 절판되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딸 은이가 샅샅이 찾아 재고품 50권을 사줬다. 이거 다 쓸 때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잘 생존하시라고. 웃었다. 엄마, 기네스북 최대년령자 되겠네.


#밤의서점#4월일기#10년다이어리#울음일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