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빕니다

by 시인 이문숙

큰 거짓말에는 속기 쉽다

작은 거짓말에는 안 속는다

평화라는 말


이 말은 큰 말일까

작은 말일까


큰 거짓말은

입고 벗기 좋다

통기성도 좋고

발한도 잘 된다


꽉 끼는 옷은

이제 못 입는다

점점 푸대자루를 닮아가는


옷에 단추가 많을수록

신분이 높은 사람이던 때가

있었대


단추를 잠그고 풀러주는

하인이

따로


단추가 상할까봐

단추가 노할까봐

손톱을 바짝 깎아야 했대


엄마, 지금도 단추 많은 사람이

고귀한 사람이지

얼굴 보기 전 단추를 봐야지

사람보다 단추가 더 중요하지


영면하신

그분의 단추를 세어본다

하나둘여덟


분장한 얼굴 아래

하얗고 깨끗하고

조금은 심심해 보이기도

하는 단추


세상 모든 평화가 여기 모여

바깥은 그토록 시끄러운 걸까


평화를빕니다

서로 인사를 나눌 때

이 말 못해

미사 가기 싫은

사람


목까지 올라오는 그 말은

침잠을 좋아하는

동물


이 사람은

동네조형물 돌고슴도치에게

인사는 잘한다


돌고슴도치는 가시가 없어

쓰다듬기 좋다

손톱으로 긁힐 염려도


새로 핀 폭염 원추리에게는 꽃술에

코를 박는다

꽃술은 꽃의 손톱일까


삐죽하고

날카로워


지나가던 이가

쳐다보고

끅끅 웃는다


코에 뭐

묻었어요


원추리 꽃가루가

콧등에 묻었나 보네


나는 깨알 거짓에

잘 넘어가는

그분에게


잘못 깎아 욱신대는

손톱 물어뜯다가


아, 분장한 거예요 하려다

아, 그래요 하구

만다


매일 매초 내려놓지 못하고

들고 있는 원추리 색

쇼핑백 속


*발색제 가득 든

유통기한 임박 가공육

통조림과

함께 뒹구는


평화라는 흰

고물고물 동물성


내 대답에도

절대 눈 안 맞춰주고

표정 없는

그분


푹푹 쪄대는

한낮


겨울 외투에서

비질비질 흐르는


땀은 얼굴의

손톱일까

모서리일까


푸대자루 닳아빠진 외투

단추가 몇 개 간신히


오래되어 삭고 깨진

대롱대롱

매달린


*can of worms: 구더기들의 통조림. 복잡하게 꼬물대는 ‘까탈스런 사건의 불씨’라는 의미로 쓰인다.


#천둥을쪼개고씨앗을심다 #한발짝을옮기는동안 #무릎이무르팍이되기까지 #이문숙시인 #밤의서점 #장미,장미,장미#시詩여우#시인이문숙브런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