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

-과거는 흐르지 않고 왜 돌아오지

by 시인 이문숙

안태운 시집. 밤의 서점 폭풍점장님 선물이다. 합정, 불광천. 내 한 조각. 그게 얇은 손톱이든 시든 발가락이든. 시월 매콤한 공기에 부레옥잠으로 부푸는 콧망울이든. 내 부스러기가 떨어진 곳.


그 장소들이 시집 속 있다. 일종의 전리품으로 베낸 코무덤. 귀무덤처럼. 겹겹 고인 시간. 고여 격리해제가 불가능한 곳.


나는 시집 속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본다. 심지어 복개된 연신내. 종신감옥 무염시태 그 여자처럼. 파본다. 귀후비개도 땅을 파내는 참 괜찮은 찬연한 도구가 된다.


지금 발 딛고 있는 연신내 아스팔트 쩍 벌어진다. 빨래하던 여자들 일어선다. 흐르는 물 속 돌들. 편종 같다.


난 어느덧 ‘냇물론자’이다. 바다도 강도 소금호수도 늪도 아니다. 내 태몽은 냇물 아래 은반지.


모래가 품고 있는 반지가 길어올린 빛. 그걸 허우적대며 잡아올리려다 네가 온 걸 알았어.


남산 토끼, 마리아, 유화부인. 심지어 해저 산호까지 빛 보고 잉태한다.


그 내력을. 손톱 밑 새까맣게 일만 하던 엄마가. 태동을 느끼던 그때. 그때처럼 엄마가 조근대며 말할 때. 모든 여인은 신화 속 데메테르가 된다.


시집 속 불광천. 합정. 모두 물이 연루된 곳. Le mal du pays. 장소가 불러오는 영문 모를 슬픔. 이건 단순한 슬픔 이상의 질병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 일생의 모든 낮 시간을 보냈다. 그 우연의 일치만으로 시집은 나를 냇물 아래 모래처럼 잘 ‘간직해준다’.


상자 속 파쇄종이가 ‘간직’해주는 파손되기 쉬운 유약한 그때. 그 시간.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 과거는 왜 흐르지 않고 돌아오는가.


브룩쉴즈라는 소녀배우. 이름의 ‘brook’조차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불광천.


검은 털북숭이개가 달려가다 갑자기 멈춰 들여다본다. 물이 흘러가면서 내는 소리가 이상한 것 같다.


물론 시인의 시 속에 ‘세 개의 다리를 가진 흰 개’는 아니다. 과거는 또한 처형터의 시간 같기도 하다.


처형터라 물이 필요해 우물을 팠는데

민물조개가 많이 나왔다는 곳

-안태운 ‘합정’


*Andrew Wyeth, Christina’s world

#안태운#합정#물#과거는왜지나가지 않고 돌아오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