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미화부

-바다가 벽에서

by 시인 이문숙

당신은 언제 처음 바다를 보았나요. 중학교 수학여행 가서. 옛 월미도에서. 꽃지 해수욕장에서. 보길도 예송리에서. 새 공책에 붙여놓고 보는 그곳 바다. 소녀들이 건네주는 민트 잎 차. 언제 가보리라는 탕헤르 카페에서.


어떻게든 그 공책 안 바꾸고 한 해 버티렸는데. 결국 그 공책 여백 위 아래까지 다 쓰고 안 되겠어서. 결국 새 공책으로 갈아탔다. 아, 이것두 환승이네. 2025년 11월 7일. 해가 끝나려면 두 달이나 남았는데. 근데 그 ‘남짓 ‘ 못 버티고 갈아탄 새 공책아. 잘 부탁해. 또 번거롭게 두 해를 걸쳐쓰게 되었네. 푸른 뱀이 붉은 말로 바뀔 때 그 사이. 그 사이도 어떤 바다가 있을 것 같아.


11월. 기대가 없었는데 날 기막히게 좋아. 지척대는 여름 발 끌림에 그저 가을이 없을 줄 알았는데. 높고 하 드높고 그래서 어디든 발도 내밀고 손 내뻗어 보아.


오늘두 동네 강아지 짓밟아논 아기국화 가지 바시락 시든 잎 떼내. 후딱이나 재게 가서 이물재공원 덤불 아래 숨겨논 빈 물병에 물받아. 그 끊어진 가지들 꽂아줘. 누가 이 의무 내게 부여했을까. 다시 감쪽같이 화단 깊이 숨겨둬. 얘네들 이제 갓 맺은 애들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내일은 쫘악 얼굴 펴고 반겨달라고. 알았지. 이 귀염둥이들아. 별 모양 ‘아스타’들아. 고결하고 우아한 표정으로 영역 표시하는 강아지들에게 찡그리지도 못하는 꼬맹이들아.


국화는 망자들의 꽃이라는데. 땀내를 감추려 으깨는 민트처럼. 망자의 냄새 감추려 놓는 국화처럼. 근데 이 아스타는 달라. 비 오는 날에도 쫄딱 비 맞고 가는 변성기 소년 같아. 덧니 예쁜 사춘기 소녀 같아.


이 아스타들. 가을 꽃축제 끝나고 그게 아까워 동네마다 식재한 거라네. 식재, 그 말 참 어렵게 팻말에 있네. 또한 거리 ‘미화’라네.


호 그래, 나 미화부였지. 집에 가도 별 거 없는 우리는 학교에서 노닥대는 게 일과였지. 새학기 교실 미화한다구. 신문지 모아 찌그러진 양동이 물에 담그고 며칠을 불려 찰흙처럼 될 때까지 주물럭대고. 그걸 뒷 게시판에 붙여 바다를 만들었지.


불가사리 조가비 망둥어 파라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바다를 만들었지. 여기 바다야 바다. 외치다 학교 목수 아저씨께 걸려 쫓겨났지. 너네들 여기 남아 뭐하는 거야. 몰래 전깃불 켜구. 이것들이.


우리는 거기서 난생 처음 바다를 만났어. 교실미화경진 대회에서 그 바다로 상을 받았어. 너희들 대단하다. 게시판에 이런 바다를 이렇게 공들여 단체로 만들다니. 놀랍다. 근데 너희들 바다는 가보기나 했냐.


우리는 이렇게 처음 교실 뒷벽에 바다를 ‘식재’했어. 우리는 망둥어이기도 뿔 돋은 강아지이기도 했어. 이 말썽꾼 강아지들은 이 꼬맹이 아스타를 또 짓밟아놓고 가버렸네. 그날의 무서웠던 목수 아저씨처럼. 그런데 그 자리가 옛날 기타 집zip 주인이 돌보던 잭이 묻힌 곳 같아. 청년은 심지어 돌에 묘비명까지 새겨두었는데. 이 골목은 하루두 조용하질 않아.


방울새 벌레 백리향 잭이 같이 식재된 곳. 믿음교회 여자는 머리를 풀고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네. 목덜미 드러나게 머리 푼 거 보니 11월 목덜미가 시린 게지. 가을이야, 가을이란 게지. 나의 미화부 근성은 못말리지.


그 골목 어떤 연립주택 사람은 누군가 내버린 도자기 인형, 백자 항아리 이런 걸 화단 둘레에 돌을 놓고 거기 놓아둬. 이 모르는 사람두 나와 같은 과네. 미화부였을 거야. 탐날 만큼 고결한 백자는 분명 깨버리거나 부수는 사람 꼭 있어. 잘 만들어논 눈사람 꼭 쓰러뜨려 부수듯.


그걸 방지하려는 듯 돌에 접착제로 꽉 붙여논 이분의 염려를 알 것 같아. 근데 이 골목길 사람들은 그걸 잘 구경하구 참 좋다 하며 지나가.


거기 커단 소라 고둥도 있어. 거기서 바다가 웅웅대며 오늘두 철썩거려. 내가 본 처음의 바다는 스스로 만든 바다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 뒷편에는 뽕나무밭에서 누에 기르는 나병환자들이 모여 살았어. 사람들에게 폐 안 끼치고 자력갱생하는 사람들.


우리 중학교 미화부원들은 교복 소매에 종이찰흙 덕지덕지 붙이고 바다를 만들고 바다를 채색했어. 그걸 알아봐준 미술 선생님. 이렇게 사춘기를 바다와 함께 건너갔어. 귀한 신문지를 모으고 물에 불리고 으깨고 그게 ‘변환’된 바다. 아, 기특하다. 우리들의 자력 갱생. 환승 변환 변모란 바로 이거인 게지.


밥줄인 성가대에서 쫓겨난 변성기 소년처럼. 학교에서 쫓겨난 우리들처럼. 변성의 목소리를 버리고 악기 비올로 갈아탔던 마랭 마레처럼. 나무 판자 오두막에서 스승 생트 콜롱브를 엿듣던 그 제자처럼. 미화부였던 우리는 그렇게 바다를 듣고 열어젖혔어. 지금두 내 손과 발은 그냥 미화부야. 저절로 뭔가 돌보고 꾸미려고 해.


생트 콜롱브 정원 뽕나무 가지. 뽕나무mûrier. 남성의 변성mur. 열매 오디mûre. 익다mûrir. 인간의 허물 벗기mue. 변성 털갈이 뿔갈이 변환 변모. -파스칼 키냐르, 음악 수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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