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물과 나
7월 31일이 가고
다음날인 7월 32일이 왔다
7월 32일이 와서는 가지 않고
족두리꽃이 피고
그 다음날인 33일이 오고
와서는 가지 않고
두릅나무에 꽃이 피고
34일, 35일이 이어서 왔지만
사람의 집에는
머물 곳이 없었다
나는 7월 32일을 자귀나무 속에 묻었다
그 다음과 다음날을 등나무 밑에
배롱나무 꽃 속에
남천에
쪽박새 울음 속에 묻었다
-‘물물과 나’
나는 시인의 시를 생각하면 루소의 그림 ‘잠자는 집시 여자’(1897, 유채, 뉴욕현대미술관)가 떠오른다. 사막 모래 위에 잠든 그녀가 가진 것은 만돌린 한 개와 물병 하나.
여기에 두 마리 사자가 있다고 치자. 한 마리는 그것을 보기만 한다. 또 한 마리는 다가간다. 일단 만돌린을 덥석 문다. 버린다. 발에 걸리는 물병을 멀리 차버린다. 그리고 누워 있는 여자를 건드려 본다. 피곤에 전 딱딱한 종이짝 같은 여자를 찢을 것이다. 아니, 찢으라고 생각은 그렇게 시킬 것이다.
그러나 한 마리 사자는 보기만 한다. 유난히 샛노란 눈알 속에 그것은 널려 있는 물물(物物)일 뿐이다. 좋은 먹잇감인 여자도, 여자에게 가장 소중한 만돌린이라는 악기도 노래를 부르다 목을 축였을 물병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봐야한다고, 그렇게 보라고, 갈 바 없이 무엇을 볼 때마다 생각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부추긴다. 생각은 시차도 없이 회백질 뇌에서 털석털석 떨어진다. 그 끝도 시작도 모르는 생각들에 뒤덮힌 물물들은 숨이 막혀 청색증을 앓는다.
그러나 화면 속 사자의 눈은 그렇지 않다. 그냥 물끄러미 볼 뿐이다. 그 시선 아래 물물들이 서로 엮이고 관계 맺는 시간을 기다리기만 한다.
시인의 8월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7월이 다 가고 나도 영원히 7월만 지속될 것 같다. 이렇게 시인의 눈에 닿은 물물들은 모이고 흩어져서 우리에게 어떤 기이한 시간을 던져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혼자 훌쩍 날아올라 비칠대는 온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날아넘은 허공을 들여다 보는’(시 ‘나비’)나비의 날짜. 심지어 곤충표본 속 나비조차 스스로 핀을 뽑고 다시 비칠대며 날아오를 것만 같은 비현실의 시간.
머물 곳이 없는 사람의 집에는 7월31일과 곧 닥쳐올 8월1일이 비칠거리고 있다. 8월은 오지 못한 채, 7월의 32일, 35일이 흘러간다. 그렇게 물물들이 오롯이 존재하는 시간. 족두리꽃과 자귀나무와 쪽박새의 울음 속에 묻은 ‘사이’의 시간.
그렇다면 우리가 알지도 못한 채 흘려보내는 물물의 시간 속에 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하려면, 잠시라도 ‘지상에 내려놓은 나의 하체를 지워야’ 한다는데(시 ‘안개’), 새의 다리처럼 가는 다리를 주섬주섬 챙겨야 한다는데(시 ‘조주의 집’), 못한다. 못하고 있다.
김수영의 말대로 ‘좀벌레의 솜털’만도 못한 세상의 다리(橋), 세상에 뿌리 박은 거대한 관념의 뿌리를 거둬야 한다는데, 그냥 후둘대며 다리 아래 시퍼런 급류만 내려다 본다. 빈 가지에 꺼꾸로 매달려서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고만 있다. 그 아래 사물들이 우우대는 뻥 뚤린 허공이 무서워서. 시인이 앓던 말년의 폐기공처럼 뻥뻥.
‘인간의 시간으로는 약 5분쯤 두 다리로 온몸을 들고 한동안 앉았다가 앞뒤로 몸을 흔들며 동쪽을 보다가 주섬주섬 두 다리를 챙겨 서쪽으로 갔다’
-‘조주의 집 1’
시인이 제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썼다는 그 마지막 시처럼 ‘더 잃을 것도 없는 오후다!'
*
그때부터 눈이 털석털석 왔다. 쿨쿨 왔다. 쩌릿쩌릿 왔다. 아니, 눈은 오지 않았다. 눈은 불길한 밤의 악몽을 치유하려는 듯 털벅털벅 왔다. 그 길을 따라 발자국이 쭉 나 있었다. 나무는 붉게 물들어 ‘붉은뺨딱새’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다. 눈은 오지 않았다. 거기 박혀 있던 문패의 이름을 지우려는, 흰 깡통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던 흰 페인트가 흰 눈을 뿌렸을 것이다. 저 흰 깡통의 페인트처럼-저 주루룩한 물질이 딱딱하게 굳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호흡 속으로 들락날락했는가. 뇌수 속에 뒤엉킨 회백질의 우월한 우쭐거리는 생각들이 그렇게 되는 걸 원하지도 않는 사물들에 얼마나 번지르한 광택을 덮어씌웠나.
반대로 얼마나 많은 것을 말소해야 온전히 사물들은 자기 자신이 되나. ‘좀벌레의 솜털’만한 다리도 못되는 의미의 교량을, 세상에 뿌리박은 육체의 다리를 절단해 내야 그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나.
사물들이 ‘이미지의 미라’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그 표면으로부터 투신과 추락을 경험해야 되나. 얼마나 더 큰 결핍과 고통을 치뤄야 ‘날것’이 되나. 얼마나 큰 사막이 펼쳐져 있어야 ‘미라’가 될 수 있나.
‘붉은뺨딱새’가 사물의 안을 날카로운 부리로 콕콕 쪼아댄다. 영원히 굳지 않을 것 같은 페인트는 흰 깡통 밖을 벗어나 시인의 로울러로 옮겨진다.
문패의 이름 위로, 그 이름에 딸려오는 많은 생각들, 경험들 속으로 주루룩 흰 페인트를 흘려보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다리, 다리, 다리들’을 주섬주섬 챙겨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밖으로 딱새처럼 휙 날아가 허공에 함몰되어야 한다.
카메라의 눈이 선택한 필터의 조작이나 기계적 윤색 없이 이미지의 ‘미라’를, 시인의 눈이 인위적으로 재배치하거나 구성하지 않은 사물의 내향성을 따라가야 한다.
관념이 주루룩 미끄러지고 낙하한, 그렇게 노랗고 망연자실한 사자 ‘눈알’을 가끔 우리 눈동자에 대신 박고 세상의 풍경을 말소하듯 바라봐야 한다.
죽음처럼 납작한, 종이처럼 얇은 집시 여자를 그녀의 물병과 만돌린을 내려다 보는 사자의 눈알. 여자는 더 이상 사냥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은 더 이상 사냥감이 아니다.
사자의 거대한 머리통을 비우고 잠시잠깐 깜박 불꽃 속에서라도 잠자리만한 소규모 머리통 갖기. 흔들리는 가늘한 수초를 잡고도 수평으로 고요히 앉아있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32일, 35일이 있어야 하나.
어느날 산책 끝에 발견한 시인의 집, 시인의 이름이 박혀 있던 문패, 시인은 멀리 계신데, 시인은 멀리 아프신데, 어느날 사라지고 없던 문패, 페인트 깡통이 주루룩 흘리던 흰 페인트처럼 눈이 펄펄 왔다. 아니 그때는 늦가을이었는데 시인의 집 앞에 붉나무가 물들고 있었는데, 눈이 쿨럭쿨럭 왔다. 컹컹컹컹 왔다.
*오규원 선생님과 1989년 명동성당 전진상 기념관 작은 강의실에서 지금은 멀리 가신 최정례선생님과 습작이란 걸 했다. 이렇게 시 쓰면 안된다는 소리만 들었다. 서랍 속에 간직된 그날의 불안들이 가끔은 걸어나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12월 49일에 빨간 동그라미를 겹겹이 쳐놓는다.
#오규원시인#최정례시인#이문숙시인#7월#8월#앙리르소
* Henri Rousseau, The Sleeping Gyp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