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긴 단어
* 새파란 침묵, 고양이 누룽지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점심시간이 다 지나간다. 아이쿠, 남은 ‘잔반’ 같은 내 인생 , 그 형편없는 시간을 ‘태양’이라는 거대한 주물 냄비에 구우면, ‘누룽지’처럼 고소하고 파삭해질까.
이런 이름을 가진 고양이라면 길러 봤음 좋겠다. 고소하고 적당히 딱딱해 혀로 녹여 먹기 좋은 누룽지.
몇 달 전, 집 바로 옆 이물재 공원에서 한차례 웅성거림이 있었다. 왼쪽 귀가 잘린 떠돌이 고양이 누룽지.
교대로 줄진 누렇고 흰 무늬가 누룽지 같다고 초등학생들이 처음으로 불러 줬던 그 이름은 이제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야, 너만 보면 입에 새파란 침이 고여. 꽃냥이라든가 나비라든가 초코라든가 이름에 장식의 탄내가 나지 않아서.
누룽지야, 잘 잤니. 누룽지야, 환경미화원이 네 집을 철거하진 않았니. 밥은 먹었구 몸단장은 했어. 간밤엔 춥지는 않았어.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누룽지누룽지.
누룽지는 그런 사람들 앞에서 조용히 앞발을 모으고 , 그들을 빤히 쳐다본다. 그리곤 찰스 부코스키의 시 ‘호객꾼 , 수녀 , 식료품점 점원 , 그리고 당신을 위한 것’을 연둣빛 눈으로 들려준다.
‘이 달팽이 같은 사람들아, 뱀장어 같은 사람들아, 이 괄태충 같은 사람들아, 아니 그만한 쓸모도 없는 사람들아’*
사람을 봐도 달아나지 않고 옴쭉 앉아 새초롬히 침묵을 지키는 고양이. ’새파란 침묵’이란 건 이런 걸 부르는 말일까.
어느 날은 꼬맹이들이 자기가 끌고 자던 애깃쩍 나실거리는 이불을 갖다 준다. 또 어느 날은 엄마 몰래 참치 캔을 갖다 준다. 그러나 그걸 몰라라 담뿍 앉아. 야, 이것봐. 침묵의 정수를 너희들은 알기나 하니.
이래저래 바쁜 친구들이 서둘러 가던 행보를 멈추고 올 적 갈 적 앉아 본다. 나도 그중 한 명이 되어 쭈그리고 앉아 누룽지야, 불러본다.
누룽지는 가르쳐 준다. 친구와 사이가 거북할 때 , 날카로운 말의 이쑤시개 들이밀지 말고 침묵으로 살살 녹여 없애는 법 .
‘넌 진지충이라 싫어.’ 친구가 샐쭉하게 말 안 해도 누룽지처럼 ‘새파란 침묵’을 간직하며 친구가 다시 말 걸 때까지 기다리는 법 .
* 새빨간 침묵, 안내견 태양이
이런 이름을 가진 개라면 길러 봤음 좋겠다. 태양이 . 오늘은 학교에 정말 가기 싫은데, 저 웬수 같은 태양이 우리 태양이의 눈을 훔쳐가서 오늘도 뜨는구나. 아이구, 태양아. 오늘은 네 또랑하고 눈부신 눈 좀 지켜.
우리 학교 시각 장애인 영어 선생님의 안내견 태양이. 눈이 호롱불처럼 태양처럼 진지하고 또롱하다 .귀는 털장갑처럼 부드럽고 코는 반질하다 .
수업 시간에 태양이는 아이들이 소리 질러도 뭐라고 소근거려도 짖거나 움직여선 안 된다. 두 발을 모으고 궁둥이를 붙이고 가만 침묵을 지켜야 한다 .
이럴 때 이 괄태충만도 못한 사람은 이걸 태양처럼 ‘새빨간 침묵’ 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영어 선생님이 질문한다.
‘세상에서 가장 긴’ 영어 단어는 뭘까.
아무도 대답 못한다. 모르겠다. 답답한 침묵이 고인다. 속절없다. 무력한 고요. 정말 영어는 나를 바보충으로 만든다. 그때 안내견 태양이가 길게 미소를 머금는다.
선생님이 태양이와 미소를 교환한다.
혹시 거기 힌트가?
‘s’로 시작하고 ‘s’로 끝나는데,
그 가운데는 도로에서 볼 수 있어.
뭐지?
결국 전자 칠판에 답을 적는다.
‘smiles’, 정말 길지 않아?
첫 자 s와 마지막 자 s 사이가 마일mile이나 되니까.
맞다. 세상에서 가장 긴 단어. 애들이 소리없이 쿡쿡 웃는다. 아무도 못 맞췄는데,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칭찬 스티커를 준다. 와, 내가 좋아하는 파란 왕별이닷! 태양이가 꼬리를 흔든다.
영어를 죽을 만큼 싫어하지만, 태양이가 같이 있는 수업 시간은 졸지 않고 귀를 쫑긋하고 들을 것만 같다. 앞으로 약속할 게, 태양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리며 태양이의 새빨간 침묵을 따라 입술을 귀까지 끌어올려본다.
공책 표지의 영어라는 글자를 짝꿍이 ‘영구 없어’라고 고쳐놓긴 했지만. 영어는 이빨빠진 영구처럼 나를 자꾸 원형 탈모의 바보로 만들지만, 내 눈은 이미 푸른 왕밤별이다. 태양아, 너는 낮을 책임지고 나는 밤을 맡을게.
이 시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영어 단어, ‘floccinaucinihilipilification’ 을 배운다 해도 지루하지 않겠지. 태양이만 태양이의 또롱한 눈만 있다면 .
그 단어에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 무’nihil가 들어있다. 난 이미 허무의 맛을 알아버린 밤의 별. 무가치한 것을 ‘감히’ 무시하고, ‘무분별한 것’을 감히 경시하는 법을 알지. 환대하는 법과 나란한 홀대라는 불문율.
선생님은 또 써주신다.
소년들아, 분발하렴. 그러나 권력과 돈에는 말고
Boys, be ambitious, not for power, money.
태양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무시무사무구무아무념무상무개념
아이고, 바보야. 무개념은 안 되지.
나는 혼자 슬며시 웃으며 이 세상에 가장 멀고 아름다운 ’웃음’ 이라는 길을 상상해 본다. smiles.
*paul Cézanne, Boy in a Red Vest, 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