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조금 더 자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아이와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면,
회사에 복직한 뒤로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늦은 퇴근,
아이보다 늦게 집에 도착한 저녁,
아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하루가 끝나는 날들.
그럴수록
마음 한쪽에
미안함이 쌓였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보상이었다.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장난감을 하나 더 사주고,
전에는 일부러 피하던
캐릭터 장난감이나
전자기기도
하나둘 집에 들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좋아하니까.’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선택들은
아이보다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는
새로운 장난감을 받을 때마다
분명히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이거 사줘.”
“이거 있으면 좋겠어.”
집에서 함께 놀자고 할 때도
대화의 끝은
자연스럽게
“새로 사준 거 가지고 놀아”로
흘러갔다.
나는
아이와의 시간을
조금씩
물건에게 맡기고 있었다.
대화는 줄어들었고,
아이의 요구는
점점 또렷해졌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말했고,
거절하면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제야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대로 괜찮을까.
미안함을
이런 방식으로 처리하는 게
맞는 걸까.
결정적인 순간은
아주 사소했다.
아이가
함께 진저브레드를 만들자고
말했을 때였다.
그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이가 원했던 건
새로운 장난감이 아니라,
책이나 영상으로 봤던 것을
나와 함께
직접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함께 시간을 쓰고,
같은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그 마음이었다.
그래서
규칙을 정했다.
장난감은
아무 때나 사주는 것이 아니라,
기념일이거나
아이가 스스로 의미를 만든 날에만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대신
함께하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었다.
길지 않아도 괜찮았다.
같이 책 한 권을 읽고,
같이 그림을 그리고,
같이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그 선택 이후
아이의 요구는
조금씩 달라졌다.
“이거 사줘” 대신
“엄마, 같이 이거 하자”라는 말이
늘어났다.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보상이 아니라
관계였다는 걸.
이 글은
장난감을 사주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미안한 마음을
물건으로 해결하려 할 때,
그 미안함은
관계까지 대신해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날 이후
나는 하나의 기준을
마음속에 남겼다.
미안함은
물건으로 채우는 게 아니라,
관계로 다뤄야 한다는 것.
이 글은
『단단한 워킹맘의 소신육아
– 흔들려도 다시 돌아올 기준을 만드는 기록』
의 일부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붙잡고 있던 선택들을
내려놓게 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