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by 이파리

새끼들에게 모이를 줄 때 그리하듯 연수는 아이들의 입을 향해 부리를 열었다.
"첫만남 때부터 그 사람은 제게 푹 빠져있었으니까요."
연수는 웃는다. 그건 틀림없이 구렁이의 사술 때문이었겠지만, 없는 말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놀부가 자신에게 빠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테니까.
"무슨 짓을 했길래?"
"바보야, 저렇게 예쁘니까 그렇지."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연수는 웃는다.
"어떻게 만났는데?"
작은 아이가 물었다.
"한밤에 갈 곳이 없어 방을 청했더랬지요."
연수는 아이를 따스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시간이 더없이 좋았다. 이런 시간이 계속 된다면 인간으로서의 삶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러나 그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야, 니들 뭐해."
소연이었다. 가장 처음 연수에게 말을 걸었던 아이. 아이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대장노릇을 하고 있다.
연수는 긴장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연은 놀부가 찾아온 날 이후로 줄곧 연수를 무시하고 있었다.
"언니."
한 아이가 조심스레 소연을 불렀다. 소연은 화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연수를 거세게 밀쳤다. 연수가 비틀비틀 옆으로 비켜섰다.
"내가 가까이 가지 말랬지. 다 잡아먹히고 싶어?"
소연의 말이 사나웠다.
"하지만 언니."
"구미호가 아니래."
아이들이 변명하듯 대꾸했다. 소연은 기가 막히는 듯 하,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니들 다 멍청이야?"
한 손으로 연수를 가리킨다.
"저게 정말 괴물이면 자기가 괴물이라고 하겠어?"
아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수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 소연의 눈빛이 시퍼랬다.
연수는 생각한다.
저 아이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다시는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없겠구나.
그 생각이 연수를 슬프게 했다.
"소연."
소연은 말없이 연수를 째려보았다.
"잠깐 시간을 내주겠어요?"
소연의 표정이 한층 일그러졌다.

흥부의 집에서 아이들에겐 모두 각자의 일이 있었다. 나이가 어리면 어린대로, 많으면 많은대로 그랬다. 소연은 나이가 차 몇 달 뒤면 성인이 될 참이었고, 그런 소연에게는 어린 아이들보다 더 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소연은 방 안에 머무르는 때가 드물었다. 새벽같이 나가서 하인들과 함께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밤늦게 돌아와 잠에 들곤 했다. 이따금 쉬러 들를 때도 아이들을 챙기느라 제대로 쉬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 소연이 내어준 시간이 귀하다. 연수는 소연이 아이들을 내보내는 사이 빠르게 할 말을 정리했다. 연수의 청을 무시하지 않은 것은 소연이라는 아이가 가진 본질적인 선함일 터였다. 그러니 자신도 그에 따른 보답을 해야한다고, 연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미안해요."
이 말은 연수가 준비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에서 튀어나왔다. 소연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침묵이 흘렀다. 소연은 답이 없었고, 연수는 의도치 않게 튀어나온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할지 몰랐다. 생각을 거듭해 말을 찾는다.
"당신이."
"왜?"
두 사람의 말이 겹쳤다.
"왜 사과하는데?"
소연의 말이었다. 소연의 얼굴이 매서웠다. 조금이라도 말을 잘못하면 방을 박차고 나가리라.
"무시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변명처럼 뱉는다. 여러가지 말이 생각났지만 그 중 무엇도 소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얼마나 흥부를 존경하는지 알아요.
당신은 사실 곧은 사람이죠.
제가 잘 못 했어요.
놀부는 못 됐어요.
그 어떤 말도 적절하지 않았다. 소연이 원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연수는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이제와서 그런 건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는 소연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연수는 무어라 답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또 침묵이 방안을 채운다.
"네가 놀부의 애첩이지?"
소연이 물었다.
"어쩌면요."
연수는 머뭇거린다. 애첩이라는 단어의 뜻은 바로 떠올랐으나 그것이 맞다고 대답하는 것에 거리낌이 있었다. 애첩. 분명 맞는 말이나…….
"왜 여기에 온거야?"
소연이 물었다.
연수는 고민했다. 어디까지 말하면 좋을까. 모든 걸 털어놓아도 괜찮을까.
흥부는 괜찮았다. 그의 선함과 진정성은 소문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매번 놀부에게 구박 받으면서도 어김없이 찾아와 하는 말에는 일관성이 있었고 애정이 느껴졌다. 그러니 털어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놀부의 삶을 걱정하는 이라면 그의 죽음에 초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연은 어떨까. 소연은 아직 어리고 충동적이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 받아들여주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청할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것이 생략된 말이었다.
"아저씨한테?"
"네."
"그래서 아저씨가 너한테 그놈 집을 나가라고 했구나?"
"네."
"넌 갈 데가 없었고?"
"네."
상황을 보기라도 한 듯이 소연이 줄줄이 읊었다. 이어 소연은 울분을 터뜨린다.
"아저씨 바보."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어지간히 분한 것이 아닌 듯 했다. 바닥이 둥둥 울렸다. 방문이 빼꼼 열렸다.
"언니 괜찮아?"
"왜 그래?"
아이들이 쫑알댔다.
"들어오지 말랬지."
소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덜컥 문이 닫힌다. 문 너머로 아이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놀부네로 돌아간들 아저씨가 슬퍼할 뿐이겠지."
소연이 중얼거렸다. 여전히 분한 기색이었다.
"나는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소연이 연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아저씨가 몇 날 며칠을 수모를 당하고 마음 고생하시는 걸 봤어. 너도 그걸 봤다면 거기서 그러고 있지는 못 했을걸."
확신을 담은 말이었다. 연수는 침묵했다.
"그러니 아저씨가 널 용서했다고 해도 난 널 용서하지 않을거야."
소연의 말이었다. 연수는 어쩐지 그 말이 연수보다는 자신을 향한 말 같다고 생각했다.
소연은 그대로 한참을 연수를 노려보다가 훽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열린 문 너머로 뭉쳐있던 아이들이 소연의 기세에 놀라 흩어지는 게 보였다.
"언니!"
아이들의 부름도 뿌리치고 소연은 떠나갔다. 아이들은 연수에게로 모였다.
"정말 놀부의 애첩이야?"
제일 먼저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연수는 웃었다.
다 들렸구나.
하기사 문에 바짝 붙어있었으면 들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어쩌면요."
연수는 소연에게 한 것과 같은 대답을 했다. 아이들이 엄청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놀부가 잘 해줬어?"
"놀부네 밥은 맛있어?"
"금은보화는 어디 갔어?"
점점 커지는 목소리로 질문을 우수수 쏟아낸다. 아이들의 눈이 번뜩일 정도여서, 연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연수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연수는 쏟아지는 시선 쏙에서 한참을 킥킥대고 웃었다.

그 날 이후로 소연은 연수를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이따금 말도 걸고 아이들을 위해 챙겨온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소연이 연수를 대우하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연수를 대함에 거리낌이 사라졌다. 제일 어린 향아는 툭하면 연수의 치맛자락을 붙들었고, 다른 두 아이도 연수를 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하루, 또 하루가 흐른다. 해가 뜨고 지고 날은 차가워진다. 아이들이 친근해지는 만큼 연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동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사이 흥부는 두어번 연수를 찾았으나 앞으로 어찌할 지에 대한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어디서 구렁이를 주로 만났는지를 한 번 물은 뒤로는 안부를 물을 뿐이었다. 마지막 만남에서 나눈 대화는 이랬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아니오."
흥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변화가 생긴 것은 동지를 아흐레 앞둔 날이었다. 흥부는 연수를 처음 대화를 나눴던 정자로 불러냈다.
"왔느냐."
정자에서 연수를 기다리는 것은 흥부만이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험한 삶을 살아온 것 같은 다부진 사내가 셋이나 있었다. 연수는 잠시 멈칫했다.
"올라오거라."
흥부가 말했다.
연수는 정자에 올라 그들과 마주 앉았다. 흥부는 차례차례 사내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이강이다. 화약과 덫을 아주 잘 다루지."
이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몸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영리해보였다.
"무진이라고 하오."
이강 옆에 서있던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무진은 눈썹이 짙고 덩치가 큰 사내였다. 척 보아도 힘을 제법 쓸 것 같은 이였다. 위협하려는 기색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눈빛이 쏘는 듯이 강렬했다.
"이 분은 박치성이라 하네. 이 근방에서 제일 가는 궁수지."
치성은 눈매가 사납고 마른 자였다. 날카로운 기세는 마치 바람도 가를 듯했다.
연수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들은 사냥꾼이다. 앞에 서기만 해도 모공이 송연하고 등줄기가 서늘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한 손으로 내리누른다.
"연수라고 합니다."
시선을 돌리는 것이 두려워 간신히, 정말 간신히 고개를 숙였다. 입이 마른다.
"이 분들에게는 사정 이야기를 했다."
흥부의 말이었다.
"그렇군요."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 이것은 분명 구렁이의 힘일 터였다. 놀부의 앞에서도 동요가 밖으로 샌 일이 없었다.
"네 힘이 필요하다."
흥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연수는 끄덕임으로 그에 답했다.
그 날부터 흥부는 집안일도 미뤄두고 별당에 틀어박혔다. 출입이 허가되는 것은 흥부 부인과 신뢰할 수 있는 하인 몇 뿐이었다. 별당에는 덫과 그물, 총과 활 같은 사냥 도구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흥부와 세 사냥꾼은 근방의 지리를 그린 지도를 사이에 두고 하루종일 계획을 짰다. 연수는 그 사이에 끼어 이야기를 듣다가 질문에 답하거나 이따금 인간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고쳐주었다.
인간의 시선에서 본 산은 조금도 자신이 살던 곳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연수는 이따금 네 사람의 뜨거운 의견 교환을 뒤로하고 별당을 나와 멀리 보이는 산을 보며 생각했다. 저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이전처럼 그곳에서 포근함과 자유를 느낄 수 있을까.
연수는 고개를 젓는다.
일단 돌아가고 나서 생각하도록 하자.
연수는 몰랐다. 이전의 자신은 그런 생각이란 것을 애초에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비였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도.
"생각이 많아보이는구나."
돌아보자 흥부 부인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연수는 고개를 숙여 부인을 맞았다.

수요일 연재
이전 11화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