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인연 - 큐슈
# 시사이드 모모치에서 만난 망고청년
큐슈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숨통을 조여오는 더위에 일단 바다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해질녘이라 급하게 달려온 바다는 헐떡이는 내 숨소리가 여유를 깨뜨릴만큼 모든 것이 한가로이 흐르고 있었다. 온몸으로 즐거움을 표현하는 꼬맹이들, 더위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한 연인들,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는 자유로운 영혼들까지. 저들 또한 고민 한 짐 안고 사는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일텐데, 멀리서 보면 늘 그렇듯이 행복하기만 한 사람들을 한 데 모아 둔 것처럼 그저 평화로워 보인다. 나는 마치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걸려 있는 한 컷의 사진을 바라보듯 잠시 감상에 빠진다.
혼자 온 여행에 외로움 같은 건 없었는데 바다라서 그런지, 다들 혼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낭만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에 슬쩍 쓸쓸함이 비집고 들어오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모래사장을 걸으며 혼자 낭만을 곱씹다 보니 갈증이 나서 해변에 있는 망고쥬스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에 들어서자 사람 좋게 생긴 망고 청년이 주문을 받으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유학생이냐 여행왔느냐 물으며 몇 마디를 더 건넨다. 여유로운 바닷가, 한가로운 쥬스가게에서 망고청년의 망고쥬스가 여유롭게 제조되는 동안 이런 저런 대화가 오고 갔다. 이럴 때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물론 여행자에게 그 나라의 언어 구사력이 필수일 필요는 없다. 더욱이 입을 통한 말이 아니어도 여행자의 언어는 놀라울 만큼 다양하다(눈빛, 손짓, 발짓, 표정, 느낌적인 느낌 등등). 하지만 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것은 분명한 소통의 깊이를 준다. -영어권 나라에서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나의 짧은 영어만큼 짧게 끝나는 대화에 얼마나 아쉬워했던지-
사람 좋게 생긴 망고청년의 생글거리는 웃음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큐슈에서 처음 입을 뗀 상대와 잠깐의 대화로 처음 만난 그에게 유대감 마저 생기는 순간이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타인이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는 말이 성구처럼 느껴지는 때" 라는 순간이 이런 때일까.
# 아소산으로 가는 길
하카타에서 아소산으로 가는 길은 세 시간 남짓 걸리는 여정이다. 아소산에 가기 위해서는 두 번의 기차와 한 번의 버스를 타야 하는데, 아소산역에서 산을 오르는 버스에 올랐을 때였다. 창밖으로 펼쳐진 광활한 풍경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왔다.
"스미마셍, 아노 니혼진데스까"
고개를 돌려보니 하카타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번의 환승때마다 얼굴을 마주쳤던 두 청년이었다.
"한국사람이에요."
혼자인 나야 말을 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 옆에서 내내 한국어로 대화하던 둘의 언어가 이미 그들의 국적을 알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한국어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산을 오르는 동안 그들과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아소산을 최종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가 멋진 풍경 사이로 달리던 중에 '아소산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기사 아저씨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분화구 밑에 있는 쿠사센리에서 내리기로 했고, 분화구가 목적지인 그들은 버스에 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광활한 쿠사센리를 걸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아소산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는데, 저쪽 끝자리 쯤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소산을 갔다가 내려오는 두 청년을 다시 만난 것이다. 낯선 곳에서는 익숙함의 힘이 있다. 겨우 일면식만 있을 뿐인 우리는 낯선 얼굴들 사이로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움에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그새 글로벌한 여행자들을 만나 함께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하카타까지 같은 목적지를 두고 있었고, 세 시간 남짓의 가는 길을 함께 하기로 했다.
처음 만난 두 청년은 부산과 제주에서 온 대학생들이었고 배타고 건너와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대학 4학년이었는데 대학교라는 소속 안에서 뒷방 늙은이 신세라며 한탄하는 그들에게 걱정 말라, 곧 사회에서 새내기로 회춘할 것이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그들은 뭇 졸업예정자들의 고민인 취업 걱정 한 짐을 메고 답답한 마음에 여행을 떠나왔고, 돌아갈 날짜도 숙박지도 정하지 않은 채 즉흥적인 배낭여행을 하는 중이라 했다. 그리고 아시아 여러 나라를 여행중이라는 핀란드 사람, 영국사람이지만 부산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부산발(発) 일본행(行) 영국 사람까지. 우리는 여기까지 온 여정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고, 핀란드와 영국과 한국인의 만남에 서로의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을 총동원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공통 목적지 하카타에 도착했고, 하카타까지 함께 한 우리는 앞으로 남은 서로의 여행을 응원하며 헤어졌다.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고.
다른 출발점에서 다른 걸음새로 길을 걸어 온 사람들, 그렇게 서로의 길을 걸어 와 여행이라는 교차점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길을 걷는 동안 서로에게 동행자가 되어 주었다. 여행자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한 소통, 조금은 낯설고 생뚱맞은 만남일지 몰라도 억지스러울 것 없는 만남과 헤어짐.
우리는 그렇게 여행의 길에서 만나고 헤어졌다.
# 유후인 대합실에서 만난 할아버지
유후인 여행의 꽃이라는 유후인노모리(유후인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유후인으로 향했다. 유후인을 돌아다닐 때는 쨍한 햇볕과 더위에 얼굴이 타들어갈 뻔 했는데 돌아오려는 길에 느닷없이 거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정보다 이르긴 하지만 별 수 없이 대합실에 몸을 피해 기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가 어느 기차를 기다리느냐 묻는다. 하카타행 열차를 기다린다고 답하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자신도 하카타에서 왔고, 지금은 혼자 여행중이라 벳부로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고 했다. 한국에서 왔다는 내게 일본은 어디를 가봤는지 유후인은 어땠는지 감상을 물었고, 홀로 여행을 즐겨 한다는 할아버지는 내게 혼자 하는 여행의 매력과 벳부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시선은 내내 앞을 향하고 있었는데 마치 눈앞에 벳부의 풍경이 펼쳐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투에는 그곳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났다. 그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그의 시선을 따라 벳부의 아름다움이 그려졌다. 여행의 감상이라는 것이 오롯이 여행자의 삶을 통해 해석되듯이 노년이 됐을 때, 그때의 나는 어떤 여행을 하고 어떤 감상을 풀어갈까 궁금해졌다. 그것은 곧 나는 어떤 삶으로 노년을 맞고 있을까를 상상하게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아버지가 탈 기차가 먼저 도착하여 그는 부랴부랴 인사를 하고 기차에 올랐다. 연륜이 스민 여행자의 뒷모습을 보며 모쪼록 그의 여행이 무탈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나에게 보내는 응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탄 기차가 떠나고 잠시 후 내 열차가 도착했다. 비를 피해 들어 온 대합실에서 무료히 시간만 보내고 있을 뻔했던 공백의 시간이 살뜰히 채워진 기분이었다.
# 여행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여행의 길에서 지나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어떤 인연이 되어 눈을 맞추고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도 다른 곳에서 다른 얼굴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지금 이 여행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앞으로 또 언제 볼지 모를 만남. 낯선 길 위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이 보인다. 때로는 다를 것 없는 인간 본질의 속성에 공감하고, 때론 너무 다른 모습에 우물 밖 세상을 깨닫기도 하고, 다양한 모양새로 위안을 받고 또 용기를 얻기도 한다. 예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인상은 더 강하고 깊다. 여행길 위에서의 짧은 만남에도 긴 여운이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여행길 위에서의 만남 그리고 기록
* 메인과 글에 담긴 사진은 큐슈 여행 중에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