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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요일엔 이가체프 Mar 22. 2016

내 젊은 날의 비망록

젊음 그리고 권태에 대하여

 치열한 삼십 대를 보내고 있는 지금, 스물한 살에 써 놓은 글들을 들춰봤다. 무려 10년도 훌쩍 넘은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날 내 마음에 어떤 움직임이 있어서 그렇게 글을 써내려 갔을까 상상하며 그날의 나를 들여다 보기로 했다.


 내 스물한 살의 나이에서.  

 이렇게 글을 시작하려고 보면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만 말 그대로 내 나이 스물하나, 그 어느날에 문득 느껴본 생각들이다.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광수생각이라는 책을 읽다가 문득 뒤를 한번 돌아봤다. 책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젊음, 어디에 있든지 길 잃는 일이 없기를.' 토씨 하나까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문장이었는데, 글귀를 읽다가 내 젊음은 어디에 있는지, 길 잃고 어디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젊음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이 순서없이 삐져나왔다.


 어느날 문득 학교에서 돌아와 방 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허탈감에 나는 뭔지 모를 두려움을 순간 느낀다. 또 세수를 하러 들어간 욕실에서 거울 속 나를 바라보았을 때에도 같은 허탈감에 씁쓸함을 맛본다. 하루하루를 계획하고 보람되게 살아도 모자랄 판에 매일을 짜증과 불평 속에서 허우적 거린 것은 아닌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시끄러운 시간을 뒤로 하면 밀려오는 허탈감에 얼마나 쓸쓸해 했었는지, 내 젊음을 어디에 놓고 온 것은 아닌지, 느껴야 할 젊음을 애써 보려고 해서 생긴 상실감은 아닐지, 생각할수록 젊음이라는 것이 희미하기만 했다. 하지만 충분히 젊은 스물한 살의 나이인데 나의 젊음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왜 보이지 않았을까.


 언젠가 피천득의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모작하느라 내가 사랑하는 일상의 것들을 모조리 끄집어 내 본 것이 생각났다. 수필을 쓰면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그토록 많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주 소소한 것들이었는데도 그 글을 쓰는 동안에 나는 잠시 행복한 상상에 빠져 즐거워했다. '아주 오래된 친구들과 시원한 500cc잔에 생맥주를 가득 따라 무엇을 위해서든 건배를 외치며 한 잔 들이키는 순간을 사랑한다.' 그 때 내 수필 속의 이 글귀에서 나의 젊음이 보였다. 어쩌면 나의 젊음을 어떻게 멋지게 채울까 막연히 생각하는 동안에도 내 젊음들은 나의 일상 속에 속속들이 파고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도전과 방황의 시간에도, 저돌적인 사랑의 방식에도, 거듭되는 실패에 좌절했을 때에도, 상처받은 마음 붙들고 펑펑 울던 시간에도 그렇게 나의 젊음이 스며있던 것은 아닐까.


 내 인생의 산이 있다면 아직은 중턱도 못미친 곳에 서 있지만, 그래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참 많은 일로 인생 다 산 것처럼 슬퍼도 했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도 했었다. 정상이 까마득한 곳에 서 있지만 나의 인생등반의 시작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어쩌면 꽤 괜찮았다는 생각을 한다. 젊음이란 것이 아직 내 곁에 머물고 있고, 또한 내 젊음이 길 잃지 않는 한 나의 인생등반이 긍정적일 것 같은 자신이 든다.


 내 소중한 스물한 살의 나이에서.


 그날의 나는 문득 젊음에 대해 생각을 했고 그것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었다.

 젊다는 것이 무엇일까? 젊게 살고, 젊게 생각한다는 말 속에서 젊음이 가지는 의미는 뭘까? 스물 한 살의 나는 문득 젊음이 궁금했고 결국 내 생활 속속들이 스며 있는 즐거움과 슬픔, 좌절의 순간에서 젊음을 찾아냈던 것 같다.


 또 한 켠에는 권태에 대한 글도 있었다.


 눈이 온다. 올해의 첫눈이다.

 첫눈의 설렘보다는 머리가 젖을까봐 우산을 챙겨들고, 질퍽해질 바닥에 신발 걱정이 앞서며 성가심을 느끼는 나를 보니 낭만 잃은 늙은이 같이 느껴진다. 첫눈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사진기를 찾아 들고 감상에 빠져보던 낭만쟁이는 어디 가고 눈이 오는 것을 성가셔 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왠지 권태로워 보인다. 스물한 살의 권태는 이런 식으로 찾아왔다.


 낭만쟁이였던 스물한 살의 나.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낭만파로 생각하는 본인이지만, 이제는 눈이 올 때 풍경보다 챙겨 신을 신발을 먼저 고민하는 것이 그리 이례적인 일도 아니어서 그것을 두고 권태니 낭만 없다느니 하는 생각조차도 떠올리지 못한다. 그런데 스물 한 살의 나는 처음으로 첫눈을 보고도 감동하지 못하고 성가셔 하는 낯선 나의 모습이 문득 권태로워 보였나 보다.


 그렇다면 권태는 또 뭘까?

 이십 대 중반 즈음일까. 도서관 책장에 꽂혀 있던 이상의 <권태>를 읽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그 '권태'라는 상태에 공포를 느꼈다. 필자는 단순한 권태를 넘어 극권태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 한동안 권태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때 내가 이해한 권태는 의지의 무(無) 그리고 감정의 정지 상태였다. 어떠한 몸짓에 의지가 없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어떠한 흐름도 없는 상태. 감정이라는 것이 어느 방향으로든 흐르지 않고 고인 물 속에 잠겨버린 상태. 그것이 권태로 느껴졌다. 작가의 의도를 떠나 나는 그 책을 읽고 처음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던 권태라는 말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권태는 다양한 부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고는 한다. 그러나 점멸이 아니라 멸하지 않고 지속된다면 어떨까. 내 생활의 모든 영역에, 동시적으로 권태가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스물한 살의 내가 써 놓은 두 개의 기록을 보다가 문득 젊음과 권태를 두고 다시 생각에 빠진 나는 두 개의 키워드가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젊음과 권태는 매우 상반된 얼굴로 등을 맞대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정신이 권태에 온전히 지배당할 때야말로 젊음이 사라지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젊음은 의지를 갖고 흘러간다는 것이 아닐까.


 젊음을 단순히 나이의 많고 적음을 두고 이르는 사전적인 의미로 본다면 꼭 젊은 것이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숫자를 떠나 우리가 깊이 고민하는 젊음의 의미를 새겨본다면 나는 아직 젊음의 편에 서고 싶다.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의 흐름, 무언가에 대한 갈망 없는 생활이 상상되지 않는다. 현재가 그렇듯이 앞으로의 인생에도 나의 몸짓에 의지가 있고, 또 감정이 흐르는 삶이기를 바란다. 언제 어디선가 불시에 권태가 찾아오더라도 모쪼록 나의 정신이 극복해내기를.



* 메인 사진은 여행 중에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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