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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요일엔 이가체프 Feb 11. 2016

봄볕 같은 수다

 나는 종종 책 선물을 받는다. 물론 종종 선물을 하기도 한다. 어떤 선물이건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겼다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책 선물은 조금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받는 기분. 선물 포장을 뜯는 기분으로 표지를 살피고 첫 장을 넘겨 보는 일, 그리고 선물한 이의 마음을 상상해보는 일이 재밌다.


 나에게는 책을 선물해 주는 친구가 있다. 만날 때마다 거의 책을 한 권씩 선물 받는다. 그리고 책의 첫장에는 어김없이 짧은 편지가 쓰여 있다. 혹은 잘 고른 엽서 한 장이 책 사이에 꽂혀 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 선물도 해가 거듭되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선물거리가 식상해지기 마련인데, 그보다 잦은 만남에 같은 종목(?)의 책 선물을 받는데도 늘 새롭고 즐겁다. 그것은 책을 집어 들기까지 내게 전하고 싶은 책을 신중히 고르고 골랐을 친구의 마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친구와 나는 회사에서 만났다. 그녀가 회사에서 일한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우리가 동료로 지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회사 밖에서 더욱 친해졌다.


 우리는 자주 만나고, 그보다 더 자주 연락을 한다. 퇴근 후의 만남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영업 마감을 알릴 때까지 나누는 그녀와의 수다는 즐거운 만큼 아쉬워서, 자리를 나설 때마다 '우리 여행을 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우리는 책 한 권을 두고, 영화 한 편을 두고, 음악 한 곡을 두고도 밤이 깊도록 수다를 나누는데 그 기분이 참 좋다.


 문학도였던 대학시절, 동기들과 밤이 깊도록 문학에 대해 이야기했던 날들이 있었다. 창작의 고통을 핑계로 모여 앉아 각자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결론나지 않는 이야기에 한창 열을 올리다가 헤어져 돌아오면 가슴에 한껏 채워져 있던 이야기들. 그렇게 오밤중에 책상에 앉아 글을 마무리짓고 날이 새면 밤의 마법에 빠진 낯간지러운 글을 보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던 날들. 그렇게 고쳐 쓰지 못한 글을 발표하면서 긴장했던 합평시간. 소위 독사로 불리는 선배 한 두 명쯤 껴 있는 자리에서 얼굴을 붉혀가며 갑론을박 논쟁을 하다가도 돌아서서는 그래도 이렇게 사람냄새 나는 사람들이 좋다고 웃었던 날들. 별것 아닌 글귀 하나에 꽂혀서 열변을 토해 대화의 장을 펼치던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인이 되면서, 서로 다른 일들을 하면서, 서로의 사는 일이 바빠지면서,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문학이 관심사에서 멀어지면서 우리는 문학에 대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책을 읽는 일도 전처럼 열정적이지 않았고, 다 읽은 책보다 끝내지 못한 책들이 쌓여갔다.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거의 업무 이야기가 주였고, 20년이 넘은 죽마고우들과는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삶의 주제를 놓고 많은 대화들을 나눴지만 문학이 끼어들 자리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문학도의 본성이 죽은 것은 아니어서 문득문득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혹은 음악을 듣다가 불현듯 무엇 하나에 푹 빠져서는 깊숙한 감성을 나누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조금 갈증이 났다. 책을 읽다가 좋은 글귀를 발견했을 때, 기가 막힌 문학적 표현에 와 하고 탄성이 절로 나올 때, 그 감격과 감성을 당장 누군가와 나누고 싶을 때가 있었다. 비평수업에서나 했던 평가를 나홀로 진지하게 펼치고 있을 때, '나는 이런데 너는 어때?'라고 묻고 싶은 상대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런 친구를 만났다. 그녀가 그렇다. 우리가 회사 안에서 동료로 지낸 짧은 시간 뒤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그런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학창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의 대화 안에서 문학이 끼어들 자리가 있다는 것이 반갑도 또 고마웠다. 그런 그녀가 박사과정을 위해 회사를 그만 두고 학교로 돌아갔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언젠가 그녀가 수줍게 건넨 논문을 받아 들며 기념이 아니라 진심으로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다시 새롭게 써 내려갈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녀라면 잘 해낼 것이라 믿었다.


 문득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줄기를 끄집어내어도 진지하게 받아주는 사람, 좋은 글을 봤다고 책 한 면을 찍어 보내주는 사람, 겉돌지 않고 빠질 수 있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 따뜻하고 설레고 기분 좋은 만남. 그 친구와의 봄볕 같은 수다가 나는 참 즐겁다.


참 정갈히도 써 내려간 그녀의 손편지


* 메인 사진은 블라니 캐슬 여행 중에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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