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부는 바람에 꺼지지 않고 서서히 닳아 없어지기를
사고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나에게도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상상을 해본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삶이 끝난다면 무엇이 남을까?'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질문을 바꿔보자면...'내가 없어져도 남는 나의 것들은 무엇일까?'인 것 같다. 현재 한국에 나의 살림살이가 있고 캐나다 본가에 나의 방이 있으니 이 물건들이 모두 남는 것들이 될 테다. 참 많기도 하다.
한국에서 사 온 의자,
엄마가 사준 가방,
미술 심리치료 맛볼 때 샀던 책,
내가 좋아하는 록시땅 향수,
이케아에서 산 가구들.
나의 소비의 기준은 '필요함'보다는 '가능성'이었던 것 같다.
'이 물건을 갖게 되면 OO 할 것 같은데...'
'OO 한 상황에 쓸 것 같은데...'
나는 아마도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던 것 같다.
(넌 나를 원해... 헤어날 수 없어... I got you~~~~ 이 노래가 나의 소비에 대한 노래였던가...)
하지만, 내가 사라지면 이 물건들은 그저 의자, 가방, 책, 향수, 가구가 된다.
새로운 주인을 만나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될까?
... 지금은?
이 물건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 걸까?
오랜 기간 애용해 온 ROOTS 바지가 있었다. 얼마 전 입으려고 보니 엉덩이 아랫부분이 해져있었다. 아직도 말짱한 다른 부분과 달리 가느다란 실을 보이며 야속하게 뚫린 구멍이 어이없어서 한참 봤다. 예전에 주구장창 입었던 어떤 셔츠 이후로 오랜만이다. 셔츠는 수선이 가능했는데 이 바지는 힘들 것 같다. 따뜻함에 길어 보이는 실루엣까지 책임져주던 믿음직한 바지였다.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컸지만 한편으로 뭔가 뿌듯함이 느껴졌다. 마치 잉크를 다 써서 자욱만 남기는 볼펜을 버릴 때처럼.
이제 뭔가를 가능성을 떠올리며 사는 일은 그만해야겠다.
그동안 끌어모은 물건들을 상상한 방식으로 사용하기만 해도 앞으로의 나의 나날들이 부족하지 않게 채워질 것 같다. 예쁘게 입고 저녁도 먹으러 가고, 그림도 그리고, 타코야끼도 만들어 먹고, 사진도 잔뜩 찍고, 열고 닫는 나무 책상에서 글도 쓰고 싶다.
그러다 닳아 없어져서 사라지는 물건들처럼, 나도 천천히 자연스럽게 사그라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