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by 해날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언제 이 진리를 깨우친 걸까?

이 명언을 처음으로 한 이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그가 중년 이후에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철학을 깨우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전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자아성찰을 통해 무엇을 보았기에 그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


삶은 살아있는 자체로 소중하다.

하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 죽음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나에게 무엇보다 청렴이 중요하다면, 아무리 적은 돈의 뇌물이어도 받는 순간 나 자신을 잃게 된다.

나에게 돈이 모든 것의 기반으로 작동한다면 아마도 다른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순리대로 흐른다고 하지만 나의 선택은 나만이 진정으로 평가 내릴 수 있다.

법을 어기고 죄를 짓고 벌을 받아도 떳떳함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인간은 어릴 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공동의 규칙을 배우고 익힌다. 도덕, 윤리, 이치, 예의 등을 배우고 익힌 뒤 자율의지를 통해 자신의 범주를 굳히는 가치관을 만들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어울려 사는 개인이 된다. 하지만, 청년기 까지는 한 사람으로서의 고유성을 자유로이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엄마와 자신을 동일 시 하는 아기 때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과 자신의 정체성이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단에 대한 공격을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한다. 서서히 분리되어 자신만의 가치관을 확립해 가게 되지만 아직 그 기준에 맞춰 행동하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다 사회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며 차차 '군중 속의 고독'을 깊이 느끼게 된다.

이런 때에 자아성찰을 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나 자신은 흡사 꺼져가는 촛불이 되는 것 같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 대화하지 않고, 물어봐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고... 그저 방치해 두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각박한 사회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것 같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나만이 나 자신을 보호하여 험한 세상에 보일 수 있다. 아마도 진정한 어른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가치관으로 서로를 보는 기준이 단순하지 않기에 그 잣대의 수만큼 상처 입고 멍들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그만큼 나를 인정하고 좋아할 수도 있지만, 칭찬은 잡기 어렵고 상처는 오래 머문다. 내가 나에게 갑옷을 입히지 않으면 난 그저 무방비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고 갑옷을 너무 많이 입히면 난 움직이지 못한다. 적당히 보호해야 한다.


이 무서운 '적당히'가 평생 깨우쳐야 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나 자신을 알면 나만의 적당히를 알게 된다.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나에게 불편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는 적당히.

적당히 감사하고, 적당히 미안해하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용서하고, 적당히 벌고, 적당히 쓰고.

적당히 살 수 있는 그 기준.

이것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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