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이는 너의 머리카락

간질거리는 그 느낌이 좋아

by 해날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불이 타고,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고,

철이 빛나고,

땅이 있다.

난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의 삶을 꿈꾼다.


시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부모님은 서울에서도 캐나다에서도 나무가 많은 곳을 주거지로 선택하셨다. 아파트 단지에도 나무가 많았고, 벚꽃 길 옆에 살았던 적도 있고, 뒷마당에 나무만 가득했던 집도 있었다. 토론토의 집은 그중에서도 원탑이다. 집 근처에 나무가 종류별로 가득하고, 앞마당에 커다란 단풍나무도 있다. 집 근처에서 산책을 하다가 단발머리의 버드나무를 만나고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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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대한 나의 기억의 시작에는 버드나무가 있다. 바람이 볼을 살살 간지럽히듯 불면,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모양새가 내 마음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녹색 긴치마가 걸음에 움직이는 모양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웨이브를 고급스럽게 넣은 긴 머리 같기도 했다. 버드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거리는 아파트 담장 너머여서 사람들이 많이 걷지 않았다. 햇살이 숨은 날에는 검은 줄들을 천장에 잔뜩 달아놓은 동굴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모습을 기억하는 나에게도 음산한 길이었다. 버드나무는 두 얼굴을 가진 나무였다.


기후가 변해서 덥고 습한 날들이 늘어났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버드나무 길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해에 푸른 녹색의 이파리가 무성한 버드나무 길에 들어섰는데, 낮임에도 햇빛이 나뭇잎을 뚫고 들어오지 못할 만큼 울창해서 그림자로 길이 어두웠다. 발검음이 순간 멈춰졌었다. 그래도 좋아하던 기억에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서 나오게 되었다. 예년에 가끔 보이던 작은 녹색 송충이가 아닌 검은색의 화려한 패턴을 가진 털이 복슬복슬한 송충이가 툭툭 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여기저기서 떨어졌다...! 아주 잠깐 버드나무에 대한 나의 호감이 송충이에게도 투영되어 '참 화려하게 이쁜 벌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 자신이 어이없을 정도로 난 그 길을 아꼈다.


다음 순간 난 '이제 이 길을 걸으려면 우산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비가 오는 날에 이 길을 잠시 걸었는데 비가 와서 송충이는 없었지만 비에 젖은 나뭇잎이 우산을 붙들고 놔주지 않아 마치 공포영화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촥 달라붙는 이파리의 소리가 들리고 나를 잡아끄는 힘이 우산을 타고 느껴졌다. 놀라서 올려보니 긴 이파리들의 그림자가 우산에 잔뜩 붙어있었다. '너희들도 날 좋아하는구나...' 무서움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반짝이는 기쁨이 느껴졌다.ㅎ


하지만, 검은 송충이들의 화려함은 영향력이 너무 컸다. 버드나무와 나의 추억 만들기는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버드나무는 모두 그 길을 떠났고 특이한 노란색 잎을 가진 은행나무가 등장했다. 은행나무에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은 없다. 다만 사랑스러운 버드나무들과 갑작스러운 이별을 해야 했던 어린 나는 새로 온 가로수에게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아직도 적응 중이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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