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3년을 살며, 예전에는 몰라서 무심코 저질렀다면 이제는 내가 절대 하지 않는 것 두 가지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1.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이건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가족 욕은 나만 할 수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내 나라 욕도 나만이 할 수 있다. 같은 한국인들끼리 한국의 문제점에 대해서 몇 시간이고 신나게 불평할 수는 있지만, 한국에 한 번도 살아보지 않거나 여행만 해본 외국인이 내 나라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왜?
첫 번째, K-pop, K-drama로 인해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유럽에서 일반적인 한국의 인지도는 별 차이가 없다.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솔직하게 느낀 바는 이렇다. K-pop 이 위상을 떨치기 전인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일상생활의 체감도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에 크게 차이를 불러오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 생각보다 한국 잘 모른다. 우리는 동아시아인 (한국, 중국, 일본)과 동남아시아인들을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지만 여기는 그런 구별조차 잘 없다. 순수한 악의 없이 나를 향해 태국식 합장 손인사를 하는 이들을 해외에 거주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것이다. 한국인이 한자가 아닌 한글을 쓰는 걸로 안다면 그나마 양반이다.
아 그런 사람들은 못 배워서 그런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3년 전 내가 스웨덴에서 인턴을 했을 때 내 직장동료는 전직 변호사였다. 당시 한국이 평창 겨울올림픽을 하니 정말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한국에 겨울이 있어?"라고 물어봤다. 즉 '아시아 국가 = 태국처럼 다 따뜻하고 망고가 열리고 야자수가 있을 것'이라는 인식. 세상에 아시아에 국가가 얼마나 많고 대륙이 얼마나 큰데 말이다. 의사인 내 하우스메이트와도 비슷한 일화가 있지만 굳이 더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한류 열풍이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긴 했다. 아시아 국가 출신인 이들은 한국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고, 확실히 호감을 표현해온다. 그러나 내가 살았던 스웨덴과 영국에서 크게 체감하는 바는 없다. 여기서 K-pop, K-drama는 사실 보는 사람만 보는, 주류가 아닌 마이너리티 문화고 대부분 좋아하는 연령이 십대나 이십대 극초반으로 어린 편이 많기 때문이다.
영국 또는 스웨덴에서 일반적으로 직장생활을 한 20-30대, 학사를 졸업하고 가정을 이뤘거나 이루기 전인 평범한 영국인 또는 스웨덴인들의 인식이 대부분 그렇다. (물론, 가까운 친구 또는 동료가 동양인이었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이 역시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한국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한다면, 안 그래도 동양이 서양보다 한 단계 뒤쳐진다는 인식이 알게모르게 팽배한 나라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만 하는 꼴이라는 걸 알게 된다.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내 국적과 내 인종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지적을 할 때, 그것이 상대방이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지적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예를 들어 입가에 묻은 소스 자국은 당장 지울 수 있기에 지적해줄 수 있지만, 상대방의 키가 어떠니 얼굴이 크니 류의 외모 지적은 굉장히 무례하다. 왜? 그 사람이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좋든 말든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다. 이건 내 선택이 아니다. 그리고 그건 100% 나쁜 것도, 100% 좋은 것도 아니다. 나도 한국에서 느꼈던 남녀차별, 끊임없는 경쟁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상 등등 고질적 문제에 질려 영국에서의 삶을 선택하긴 했다. 그러나 그 좋다는 북유럽의 선진국들도 100% 천국이 아니듯, 한국도 100% 지옥은 아니다. 물론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감안하고서도 그렇다.
나는 내가 이민하고 싶은 나라를 선택하는 것도 결혼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A, B 각 나라의 장단점을 비교 분석하고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단점을 인지한 채 B 나라를 선택하는 것과, A 나라는 지옥 같은데 B 나라는 천국일 거야라는 생각으로 B 나라를 선택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내가 오래 만나 보고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단점을 안고 결혼을 해도 힘든 게 결혼생활인데, 지금 상황이 싫어 도피처처럼 뛰어드는 결혼 끝에 낙원은 없다.
한국에 대한 건강한 비판이 아닌 무조건 "가기 싫은 나라, 살기 싫은 나라"로 정체화하면 나의 정체성만 더 혼란스러워진다.
2. 회사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나를 한국인으로 소개하는 것.
아까 전에 한국인으로 사는 게 꼭 나쁘거나 좋은 것만은 아니라 해놓고, 무슨 소리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다. 그러나 이건 조금 다른 문제다.
전 투자회사 동료들과 가끔씩 만나서 저녁을 먹고는 하는데, 그중 한 명은 유대인(Jewish)이다. 최근 이 친구가 새 회사를 들어갔는데 매니저가 자신도 유대인이라면서 자신을 엮어 소개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친구는 왜 기분이 나빴을까? 결국 위의 이야기와 일맥이 상통한다. 나는 그저 나 개인일 뿐, 한국인으로 또는 유대인으로 또는 어떤 나라 사람으로 100% 정형화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진 하나의 개인이기 때문이다.
외국에 오래 살다 보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순간이 온다. 나는 한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영국인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순간이 온다. 한국을 오래 떠나 있으면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이 끊기거나 가치관, 삶의 방식이 달라지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외국 문화에 많이 적응하여 가끔은 현지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하거나 생각 자체도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런 삶의 순간에서, 나는 그저 나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 아닌, 어느 인종이 아닌, 그저 한 개인. 물론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면 내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고 한국음식을 가끔 먹는다는 부분을 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이 사람이 이런 면이 있구나를 알아가는 것과, 처음부터 "너는 한국인", 그러니 너는 "1. 매운 것을 좋아하고 2.L과 R을 구별 못하고 V와 B도 구별 못할 것이고 3. 먹방을 좋아한다."라고 추측하는 것은 몇억 광년의 사고의 차이가 있다.
한국인의 보편적인 특성으로 나라는 개인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나는 한국사람이지만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 그리고 부지런한 한국인답지 않게 게으른 면도 있고 야근은 단 한 번도 안 했으며 매일 오후 5시에 칼퇴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 그리고 나는 먹방 같은 거 하나도 안 보고 케이팝도 거의 안 듣고 케이 드라마도 잘 안 본다. 그러니 내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어떤 보편화된 행동양식과 특정한 성격을 가질 것이라고 일반화하면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이러니 옐로 피버 (아시안 피버 또는 코리안 피버)가 다가와서 갑자기 내가 알지도 못하는 한국 가수에 대한 얘기를 1시간 하거나 너는 한국인이니까 굉장히 술을 잘 마시고 나를 재밌게 해 줄 거야 라던가 너는 굉장히 착할 거야 식의 기대를 하면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인종차별이 꼭 부정적 편견을 가지고 욕/폭력을 써야만 나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인종차별은 결국 특정 인종과 그것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편견을 연결 짓는 모든 사고를 뜻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특정 인종이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가?
왜? 그 뒤에는 편견이 있다. 질문을 거치지 않은 단순한 '~~'할 것이다.라는 기대와 믿음.